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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땡감’의 가을

2018.10.19 11:12

KTN_WEB 조회 수:52

  손용상 칼럼 / 짧은 글 깊은 생각  

 

‘땡감’의 가을  

 

얼마 전, 이윤택의 ‘미투’ 사건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던 ‘밀양 연극촌’이 새로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번 예술 총감독으로 임명 받은 중앙대 이대영교수가 부임길에 뜬금없이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내며 카톡으로 짤막한 메모를 보내왔다. 내용인즉, “선배님. 누님이 길을 닦아준 ‘밀양 연극촌’ 예술 감독으로 부임하는 길에 형님 옛집에 한번 들러보았습니다. 형님네 종갓집은 시(市)에서 지방 문화재로 손을 보았는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참 좋았습니다. 허나, 그야말로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보이지가 않네요...ㅎ. 그래도 연극촌은 아픔을 딛고 새롭게 일어날 것입니다 운운...내내 건강하세요.” 메모 끝에 내 고향집 소슬 대문 모습과 내 유년이 묻힌 돌담길 사진을 함께 띄워주었다. 젊은 시절의 인연을 그래도 잊지 않고 안부 한자 보내준 이교수가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돌담 위로 솟아있는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곤 그 돌담 안쪽의 장독대 모습이 떠올랐다. 장독대 위에 널려있던 감꽃들이며, 우물에서 길어 올린 두레박에 감꽃을 띄우고 씻어 말리던 기억, 그리곤 누이와 함께 안채인 정침(正寢) 큰 마루에서 감 목걸이를 만들던 추억들이 수채화가 되어 눈앞에 다가오며 손끝을 저리게 했다. 아아,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문득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알이 젖어왔다.           
 
 컴퓨터를 뒤져 고향 주변의 ‘감 익는 마을’을 뒤져보았다. 청도(淸道) ‘감 마을’이 떴다. 장면  장면 보이는 사진들마다 누군가의 고향집일 것이다. 지붕 위로 먹음직스런 감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가을이었다. 샛노란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풍경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풍요롭게 했다. 사실 눈여겨보면, 감나무는 시골 농가의 뒤뜰이나 돌담 옆에 한두 그루 서 있는 것만이 아니다. 가파른 산비탈이나 너른 들녘은 물론 심지어 도로 양쪽에 늘어서 있다. 그래서인지 ‘감 익는 마을’로의 가을여행은 꺼지지 않는 포만감과 고향 같은 아늑함으로 충만하다. 
 공연한 궁금증에 감의 종류를 찾아보니, 먼저 바로 먹을 수 있는 단감과 익혀서 먹을 수 있는 땡감(떫은 감)으로 나눠진다고 한다, 땡감은 다시 모양에 따라 반시와 대봉으로 나뉘고, 보통 납작한 모양을 반시라 하고 둥근 모양을 대봉감(스시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문득 미당(未堂) 서정주의 시 한 수가 눈에 띈다.

 

추일미음(秋日微吟) / 서정주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계는 붉은 물이 들었지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안해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았으면 좋을꼬. 

 

시 구절 속의 짙게 물든 분홍색 감과 붉은 촉계를 떠올리면서 나의 현재를 돌아보았다.
 나는 무슨 물이 들었는가~ 안해박, 타래박이 무슨 의미일까~ 안해박은 아내를 뜻하고, 타래박은 딸들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걸까? 주먹을 놓는다는 건 또 어떤 의미 일까. 뜰 안의 아내와 뜰 밖의 딸들을 바라보는 연민 어린 시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읽고 있노라니 생각이 많은 어떤(?) 남정네가 떠오른다. 매번 가을이 되면, 또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생각이 더 많아져 마음의 색깔이 옅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그냥 시를 읊조리며 시인의 마음을 그대로 되새겨보지만, 아...그래도 아직, 가을이 와도 나는 미당(未堂)의 말처럼 속에 무슨 물이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다. 삶의 연극무대에서 여전히 상처에 반창고나 붙이고사는 나는, 그저 그렇게 설익어버린 ‘땡감’일 뿐인가?

  <참고> 秋日微吟-가을날, 나직이 읊조림 / 촉계-접시꽃, 촉계화, 맨드라미 꽃이라고 설명하기도 함.

 

손용상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