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 오르간의 발자취를 따라 ]

바다의 도시, 그 곳의 ‘산마르코’ 피플

 

바다를 접하는 도시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 이점과 약점을 품고 천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온 곳도 있죠. 오늘은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 ‘바다의 도시 이야기’ 로부터 글의 제목을 빌려와 보았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입니다. 베네치아에 대한 이야깃거리는 참으로 다양하지만, 오늘은 이곳의 음악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롬바르디아서 온 사람들이 갯벌 위에 일군 나라. 취약한 자연조건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눈부신 번영을 이룬 사이다 같이 속시원한 이야기는 꼭 한민족의 지정학적 조건하고도 닮아서인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갑니다.

 

그림 1 -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과 광장 전경 .jpg

그림 1 -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과 광장 전경 

 

그림 2 - Gentile Bellini (1429–1507)%2c Procession of the True Cross in Saint Mark.jpg

그림 2 - Gentile Bellini (1429–1507)%2c Procession of the True Cross in Saint Mark


이 베네치아 공화국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오늘 계속해서 얘기하게 될 성 마가 - San Marco 성당과 그 앞의 광장일대 입니다. (그림 1,2) 베네치아의 공화정 체제 하에 이루어지는 주요 국가행사와 상인들의 주요 활동이 이루어진 곳이며, 큰 규모를 자랑하면서도 실로 아름다운 성당과 종탑, 광장의 뛰어난 용모는 과연 베네치아임을 과시합니다. 성당 내부에는 눈부신 황금 모자이크를 비롯하여 동방과 지중해연안으로부터의 수많은 보물들이 곳곳에 있으며, 베네치아의 대표적 화가인 티치아노의 모자이크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16세기에는 무엇보다도, 음악이 참 찬란했습니다.


서유럽의 끝이면서 동방과 바다를 맞대고 있는 거점적 위치를 이용, 1000년 경에 이미 강력한 무역입지를 확보하였고, 결정적으로 십자군 원정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은 베네치아 인들은 자신의 음악도 최고의 수준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당시 전 유럽을 통틀어 음악의 주도권은 사실 다성성악 합창음악 (Polyphony) 의 대가였던 플랑드르 지방의 (지금의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 음악가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합리적이고 재빠른 베네치아 인들은 자신들보다 수준높은 음악을 구사하던 외국인들을 산마르코 성당의 최고 음악가 자리에 모셔오는데에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베네치아의 상징인 산마르코 성당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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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 산마르코 성당의 내부 

 

그림 4 - 삼촌과 조카 지간이었던 안드레아 와 죠반니 가브리엘리의 작품집인 %2522Concerti%2522. 클래식 음악사에서 concerto 라는 용어가 최초로 쓰인 예이다 .jpg

그림 4 - 삼촌과 조카 지간이었던 안드레아 와 죠반니 가브리엘리의 작품집인 %2522Concerti%2522. 클래식 음악사에서 concerto 라는 용어가 최초로 쓰인 예이다 


음악은 물리적으로는 어떠한 파장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발생하여 어떠한 공간 안을 떠돌아다니는가에 따라 우리 귀에 아주 다르게 들릴 수 있습니다. 산마르코 성당내부의 가장 특이한 점은, 바로 두개의 성가대석과 오르간이 각각 서로 마주보며 양쪽에 자리배치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기발한 음향학적 예는 이탈리아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고는 있지만, 유독 베네치아 악파인들은 이 조건을 통한 다양하고 색다른 입체적인 음향효과를 실험하고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고 기념할만한 작품들을 다수 남겼습니다. 요즘 언어로, 모노 음향에서 서라운드 음향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산마르코 성당에는 그리하여, 제1, 2 성가대와 제1, 2 오르가니스트 직위가 있었고, 산마르코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와 최고음악가 자리는 곧 16세기 전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음악가를 의미하게 됩니다.


이들 베네치아 악파는 플랑드르 악파로부터 도입한 정제되고 복잡한 대위법적 양식의 토대 위에, 규모를 확장하거나 독특하고 화려한 나름의 양식을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2개에서 때로는 5개까지 이르는 성가대를 위한 종교합창곡들이 작곡되기도 하였고, 제 3 오르가니스트와 제 2 성가대장직이 필요할 때도 있었으며, 중요한 대규모 음악행사를 위해 외부에서 음악가들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다성음악작품이 수록된 '콘체르토들 Concerti’ 이라는 작품집도 전해지는데, ‘콘체르토’ 가 오늘날엔 ‘기악협주곡’ 을 뜻하지만, 이 단어가 처음으로 음악사에 등장한 중대한 사건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셈과 여림을 지시하는 piano (여리게) 와 forte (세게) 의 사용도 이때 이곳에서 최초로 시도되었습니다. 


베네치아 인들은 또한 장중함과 화려함,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일찌기 그들이 도입한 인간의 목소리로만 연주되는 플랑드르 익피의 다성음악곡 (Polyphony 음악) 에 그들은 여러 악기를 첨가하여 더욱 화려하고 생기넘치는 음향을 탄생시킵니다.


이러한 전례음악의 자유로운 악기의 사용과 음악적 표현은 오르간음악을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되고, 몇몇 16세기 초반의 외국과 자국의 음악가를 거쳐 중후반의 Andrea Gabrieli (1520-1586) 와 그의 조카인 Giovanni Gabrieli (1557-1612), Claudio Merulo (1533-1604) 와 같은 인물들에 이르러 매우 혁신적이고 화려하며 대담한 건반악기 음악이 창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림 5 -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1567-1643) 베네치아 악파의 후기 인물로 최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바로크 시대의 거장%2c 오페라 %27오르페오%27 와 %27포페아의 대관%27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jpg

그림 5 -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1567-1643) 베네치아 악파의 후기 인물로 최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바로크 시대의 거장%2c 오페라 %27오르페오%27 와 %27포페아의 대관%27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두말할 것 없이 산마르코는 유럽 각지로부터 이곳의 음악을 배우기 위해 온 외국 음악가들로 붐볐고,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배운 것을 전승했습니다. 또한 17세기에 접어들자 이 베네치아의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과거 외국의 음악가들을 초청했듯이, 유럽 전역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베네치아가 단지 부유한 곳이었다면 오늘 우리가 그곳에 주목하지 않겠죠. 역사의 흐름 안에서, 하나의 가치있는 역할을 맡음으로 인류에 이바지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억합니다. 산마르코는 각국의 음악가들에게 ‘교류’의 장이었고, 이곳에서 그들은 함께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수백년 전 누구나 가고싶던 베네치아에 여전히 사람이 북적대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우리가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_박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