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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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나를 스쳐 간 이름 “미숙아!”

만화방창 꽃은 날마다 새롭게 핍니다. 앨버슨 문 옆에는 봄꽃 화분으로 가득합니다. 어제 환했던 금어초(snapdragon)는 지고 오늘은 피튜니아(petunia)가 한창입니다. 일하다 고개만 돌리면 화사한 봄날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등 돌리고 서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뿐이었지요. 솔솔 들어 오는 담배 연기에 열어놓았던 문을 구시렁거리며 닫아야 했는데, 어제오늘은 블라인드도 열어젖히고 문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연한 꽃잎을 흔들던 바람이 가게 안으로 몰려와 자꾸 나를 흔듭니다. 자꾸 눈길을 잡아당깁니다. 꽃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거겠지요. 바람이 스칠 때마다 꽃들은 간지러운지 키득거리며 반짝입니다.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길을 묶기도 하고 수줍은 듯 따라가 차 뒷좌석에, 트렁크에 실려 가기도 합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을 꽃들은 기억이나 할까요. 스친다는 것은 살짝 닿으면서 지나가는 것이지요. 순간이지요. 찰나를 영원으로 밀어 넣는 마술입니다. 두 세계의 가장 바깥이 서로에게 닿는 것이지요. 그곳에서는 댓잎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납니다. 안타까움이 있지요. 스친다는 것은 흔든다는 것입니다. 순전한 혼란입니다. 진솔한 움직임입니다. 진솔한 움직임이 있어 봄날이 경이로운 것이지요. 그 순전한 혼란이 딱딱한 것들을 뚫고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스침은 스치다가 스며듭니다. 보리밭 훑고 지나가는 소리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날마다 피는 꽃이 있습니다. 스치는 것이 인생 깊숙이 스며들어 날마다 피고 지는 꽃에 양분을 더합니다.

 “미숙아!” 나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덥석 잡힌 손을 놀라 뿌리치며 “누구세요?”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미숙아, 나야 만호.” “어머나, 만호 오빠? 오빠가 만호 오빠 맞아?” 놀란 것은 잡힌 손 때문이기도 했지만 호명 때문이었습니다. 미숙, 미숙이라니!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내 어릴 적 이름인가. 까마득한 옛날에 나를 스쳐 간 이름. 내 아버지가 불러주고 내 엄마, 내 혈육, 내 이웃이 불러줬던 그 이름. 너무나 꼭꼭 숨어 잊고 살았던 이름. 그래요 ‘미숙’으로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응석으로 다 해결되던 때가 있었지요.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나를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남아 있지요. 따뜻한 아랫목이 있지요. 

 너무 반가웠습니다. 싱싱했던 시절을 훌쩍 넘어 중년이 돼서야 만난 사람들. 사진으로도 접하지 못했던지라 너무나 생경한 얼굴들. 지난 겨울 한국 방문에서 둘째 오빠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보고 싶으니 꼭 오라는 말에 만사 제쳐두고 수원으로 달려갔지요. 내 단발머리 시절의 기억에 빠질 수 없는 오빠들. 고등학교 졸업식까지 우르르 몰려와 축하해주던 오빠들. 식구 같던 오빠들.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둘째 오빠가 엄마를 도와 농사일을 해야 했지요. 그런 둘째 오빠를 위해 주말이면 몰려와 일을 거들던 오빠 친구들. 그들 중에 만호 오빠는 방학이면 우리 집에 와서 살다시피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했지요. 그런 그 오빠를 엄마는 든든한 데릴사위라도 되는 양 늘 반겼습니다. 삐쩍 마른 체구에 키만 멀대같이 큰 데다 말수도 없고 더군다나 수줍음이 많았던 오빠. 그런 오빠가 잘 나가는 사업체를 이끄는 수장이라며 명함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옛날 스쳐 지날 때는 보지 못했던 당당하기까지 한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오빠한테 시집갈 걸 그랬나 봐.” 이민 가기 전 그 오빠에 대한 내 생각을 물었던 둘째 오빠의 말이 떠올라 불쑥 나온 말이었지요. 술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발개진 얼굴에 쑥스러워 눈도 못 맞추고 고개 숙여 웃는 것은 여전했습니다.

 “내가 왜 연애 한 번 못 하고 청춘을 버렸는지 알아? 그건 다 오빠들 때문이야.” 이렇게 말하는 내가 오빠들 눈에는 아직도 단발머리 깍쟁이로만 보이는지 싱글벙글하였지요. 말랑말랑해야 했을 내 이팔청춘을 시멘트 바닥처럼 그냥 편편하게 굳어버린 것은 그 오빠들 책임도 있지요. 남자들에 대한 환상이야 세 오빠를 두었으니 물론 태어나면서 깨져버렸지만, 덩치가 떡대 같은 오빠들이 늘 우글거렸으니 남자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지요. “왜 맨날 저 오빠들은 우리 집에 오는 거야?” 엄마를 도와 밥상 차리며 투덜거리던 ‘미숙’이가 그립습니다.

 우리는 스치면서 살아갑니다. 자꾸만 누군가를 편들며 지나가는 시간 속에 소소하고 시시한 스침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때론 세게 닿고 지나가는 것들에 놀라기도 하고, 조용히 스치고 지나간 것들에 스치며 그러다가 스며들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 스러지지요. 가끔은 스친 것들로, 스쳐야만 하는 것들로 엎드려 토하듯 껄껄 울음 두어 방울쯤 쏟아내고 다시 일어서서 화이팅을 외치지요.

 

 

너는 봄에서 오고
나는 가을에서 내려오고

 

한번은 여름에서 부딪칠 뻔한 찰나
엇 비키고 만 순간이
영원으로 기억되고 마는
아슬한 곡예

 

너의 가장 바깥이
나의 중심을 일렁이고 만
그 스밈

 

바람 소리 들리지 않아도
댓잎 하나
늘 흔들리고

 

졸작, (스친다는 것) 전문

 

 

김미희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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