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수필 말의 질량

2018.08.03 09:29

ohmily 조회 수: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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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말의 질량

 

말 한마디에 며칠을 끌려다녔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좀 전의 대화를 잇기라도 하듯 인사도 없이 툭 날아든 문자 한 줄. 단절의 시간도 정전 같은 이별도 없었다는 듯 미안함도 없이 그렇게 와 있었습니다. 잘 잘라내고 튼튼하게 감침질을 했다 싶었는데 우두둑 실밥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내 영혼을 흔들고 마음 언저리에 기어코 또 다른 자국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앉은 딱지는 떨어져 진물이 흘렀습니다. 길을 잃고 무작정 찾아든 무거운 말이 나를 잡고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부족한 게 많아 모자란 나는 상처 받는 말을 듣고도 더 받는 게 싫어서 다가가지 못하고 끙끙대는 바보지요. 더구나 다른 사람도 다치게 하는 말이라면 더더욱 꺼내지도 들추지도 못하지요.

 

굼벵이처럼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다 모처럼 바람이나 쐬러 가자는 남편을 따라나섰습니다. 킴벌리 미술관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한낮의 땡볕을 피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아마 피카소와 마티스 특별전을 본 뒤로 처음 찾아온 것 같습니다. 십여 년 전의 일이고 보니 그동안 참 따분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습니다. 미술관 한쪽에서는 현대미술전이. 그리고 아시아 작품 특별전을 다른 전시실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작품마다 들려주고픈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 아닌 옹졸한 나에게 작품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린다는 건 만무한지라 옆에서 셔터를 눌러대는 남편을 줄기차게 잡아당겼습니다. 

 

작품 앞에 서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저 답답합니다. 그냥 눈인사만 하고 지나치기에는 작품 수가 350점이나 되었습니다. 미술을 전공한 남편에게 해설을 부탁했지만, “그림은 해설이 필요 없어, 그냥 보고 느껴 봐!”라고 무안을 줍니다. 괜히 따라왔다고 후회를 하고 있는데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가 오디오 해설을 들으며 열심히 작품에 빠져드는 것을 보니 객기가 발동했습니다. 작품 옆에 있는 돋보기를 꺼내 들고 인상파 작품부터 작정하고 보기로 했습니다. 옛날 작품은 봐도 모르겠고 붓 터치도 밋밋해서 재미가 없지만, 인상파의 그림은 붓질에 힘이 있고 물감을 듬뿍 발라서그런지 돋보기로 보는 또 다른 묘미를 선물해주었습니다. 고갱과 고흐 그리고 마네와 모네의 그림 앞에서는 낯익은 얼굴을 보는 듯 반가움마저 들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으니 미안했는지 슬그머니 남편이 거들어 줍니다. 귀가 좋아서 그런지 눈이 맑아서 그런지 들리는 이야기를 보이는 언어를 그대로 전해줍니다. 역시 반듯한 사람은 뒤틀리지 않고 어긋나지도 않게 눈에 들어오고 또 들리나 봅니다. 드림캐처처럼 탁한 기운은 걸러내고 맑은 영혼만 느낄 수 있나 봅니다. 

 

잘라낸 천들을 담아 둔 상자를 뒤적입니다. 속 시끄러운 날에는 뜯고 재고 자르는 일보다 미어진 청바지 볼기를 누비는 일이 제일이지요. 가위 가는 대로 잘라 적당히 마음을 대고 누비는 것입니다. 길거나 커서 잘라낸 말들을 꺼내 덧대고 박아줍니다. 자꾸 덩치만 커지는 욕심도 맞춤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도 잘라 상자에 담아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미어지고 터질 때마다 적당한 마음을 골라 덧대어 다시는 헐지 않도록 튼튼하게 누빌 수만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신나는 일이지요. 오해와 불신으로 얻은 마음의 상처들을 이렇게 누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차피 인생이란 상처 난 마음도 초라한 기억도 허술한 날도 꿰매고 누벼줘야 다가올 날을, 길을 누비며 사는 게 아닐까요. 

 

좋은 날에 달뜨게 했던 말도 굳은 날에는 가라앉히기도 합니다. 두터웠을 때는 말이었던 말이 얇아진 다음에는 말 같지 않은 말이 되기도 하지요. 신용을 잃은 말이 되기 때문이지요. 말을 하는 것은 영혼이 건너가는 것이라 하지요. 생각 없이 뱉어낸 말 한마디에 쌓아 놓은 것들이 무너지기도 하지요. 말의 질량을 높이고 풋내 풍기는 떫은 말은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익히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바른말은 남을 변화시킵니다. 같은 말을 해도 예쁜 말이 있지요. 예쁜 말은 금방 젖게 합니다.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은 좋은 에너지가 되어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말을 하는 순간 뇌의 질량이 드러난다지요. 말을 적게 하면 중간은 간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중간에라도 머물 수 있도록 말을 삼키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물푸레나무가 있는 
그 집에 사는 여자는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본다
 
밴댕이 없는 연못가에서
어떻게 출렁이는 바다를 엿볼 수 있을까

 

평생 손금을 그리다 떠나는 잎이 
다른 한쪽은 언제나
그림자 드리워진 생인 걸 알지 못한다

 

무대는 언제나 비어 있어도
빈 무대인 것을 보지도 않고 
벌게진 얼굴로
나만 
나만 있다고
나를
날 세워 달라고
소리 없는 목청만 높이며 있다

 

김미희, (어떤 배역2) 전문

 

김미희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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