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친구야! 나도 네가 있어 내가 너무 좋다.

 

서울에 도착하면서부터 내내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이 애간장을 녹이는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마음을 송두리째 쥐고 흔드는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너와 나를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 종일 허둥거렸습니다. 시상식 뒤풀이에서 주말을 함께하자고 달려온 친구와 적당하게 기분을 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휘파람 소리를 가장해서 날아온 친구의 긴 사연에 밤잠을 설치고 말았습니다. 잠깐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전화 소리에 깨었습니다. 수상을 하러 서울에 오신 엘에이 사시는 선생님께서 내 속을 꿰고 계셨나 봅니다. “화장 같은 거 하지 말고 해장술 한잔하게 어서 나와요!” 그 말씀에 나는 새벽 공기를 입김으로 가르며 긴 하루를 예감하고 말았습니다. 나주곰탕 집의 새벽은 참 좋았습니다. 선생님과 마주 앉아 찬 기운 몰아내며 넘기는 해장술은 이슬처럼 맑아서 좋았습니다. 따끈한 우거지 해장국은 행복, 그것이었습니다. 
 

얼큰하게 시작된 하루는 비원을 걷기에 적당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몰라주는 시간은 힐끔거리는 것도 모자라 주춤거리기까지 했습니다. 오후에 보기로 한 연극 공연만 없었더라면 어젯밤에 올라온 친구만 아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자 쨍쨍한 겨울 해마저 야속해졌습니다. 8년 만에 만난 친구가 안내한 연극은 좋았습니다. 인사동 “여자만”에서의 저녁 식사는 완벽했습니다. 이것저것 챙겨주는 친구가 있어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잔을 비울 때마다 쓸쓸했습니다. 허전했습니다. 마음은 이미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기적 소리 울리며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식사하자마자 일어서는 친구가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친구가 떠나고 마지막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8년 만에 만난 친구를 끌고 서울역으로 달려가고 말았습니다. 부산행 KTX 10시발 표를 손에 쥐여주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친구에게 올라와서 연락하겠노라며 슬픈 표정으로 미안함을 얼버무리고 플랫폼으로 뛰어갔습니다.
 

무엇이 나를 달려가게 한 걸까요. 언제부턴가 아무 연고도 없는 내게 해운대는 꼭 들려야 하는 곳이 되어 있었지요. 계획에 없다가도 무엇에 홀린 듯 술기운을 빙자해서라도 기어코 막차에 오르고 말았으니까요. 그저 휘 둘러보면 그뿐인 바다 돌아서면 이내 지워지고 마는 발자국. 마음속에 흔적 하나 남기자고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요. 알고 보니 친구가 15년 동안 해운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체취가 나를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래사장을 쇳가루로 채워놓고 8만 리 태평양 건너에 있는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12시 40분, 도착 시각을 친구에게 알렸지요. 미라보 다리를 목마와 숙녀를 외우며 아스팔트 길을 걷던 단발머리. 검고 둥근 뿔테 안경을 쓴 그녀의 얼굴을 차장에 그리며 나는 처음으로 내 감정의 모서리가 둥글어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푸석거리던 내 영혼이 단비를 맞은 듯 촉촉해지고 있었습니다. 유독 환하게 한눈에 들어온 친구. 고맙게도 고집스럽게 지켜온 마음을 둥근 뿔테 안경으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35년 세월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 밤에 드디어 우리가 되어 해운대를 향해 무작정 걸었습니다. 그 옛날처럼 팔짱을 끼고 아스팔트 고속도로변을 걸었습니다. 목마와 숙녀 대신 쓰고 시고 달았던 우리의 인생사를 외우듯 읊어대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밤공기에 식혀야 하는 날려버려야 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처럼 웃다가 울다가 지치지도 않았습니다. 민들레 홀씨 가득 뿌려놓은 밤하늘을 가르며 두 마리의 연어가 힘차게 지나온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밤바다에 눈도장을 찍고 24시간 복국집에 들어갔습니다. 멋쟁이 단벌 신사처럼 우리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그 옛날 그 시절에 있었습니다. 싱싱한 채로 얼려두었던 그 순간이 녹아 파닥파닥 뛰기 시작했습니다. 잊고 있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와 터를 잡는 통에 애꿎은 소주병들만 보초병으로 세우고 무박 2일, 우리는 그렇게 아침을 맞고 말았습니다. 소곤대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더는 그 자리를 차고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끈한 히레소주 한 잔씩으로 해장을 하고 백사장으로 나갔습니다.  

 

 “난 지금이, 이 나이가 너무 좋다.”라고 운을 띈 친구는 속에 가둬두었던 짠기를 승냥이 울음소리로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를 놓아버리고 상실감도 못 느끼며 살았던 그 많은 계절. 낯선 것들에 길드는 동안 무뎌진 감정에 오히려 나는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눈물을 다 털어낸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래사장에 벌렁 누웠습니다. 뻥 뚫린 속이 추울까 봐 해를 끌어다 덮고 누웠습니다. 하늘이 바다를 닮은 건지 바다가 하늘을 품은 것인지 하늘을 아니 바다를 보고 누웠습니다. 축축하고 눅눅했던 지난한 계절들도 따라와 옆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파도 소리가 은은한 바닷냄새로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걸어올 때 은근하게 친구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내가 좋다. 그런데 네가 있어 내가 더 좋아졌어.” 
 

배후가 있어 좋습니다. 응석 부려도 될 것 같고 무슨 짓을 해도 이해해줄 것 같은 내 편. 결코,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도 그렇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배후, 내 편.  

 

민들레 홀씨도 품어주던 하늘
바다가 그 하늘을 바라 마주 보고 눕듯 모래밭에 누우리
진물 흐르던 시절을 촘촘히 박아 간직해 두었던 
첨삭도 하지 않은 말들을 모두 풀어
차라리 파도 소리 덮칠 때쯤 큰소리로 외치리
사랑한다고
점자처럼 더듬던
뜯어낸 바늘구멍 같은 오래 멈춰 있던 말줄임표
손끝에서만 바람 소리로 맴돌던 주어가 빠진 문장들에
가끔 쉼표도 붙여
매듭 가득한 나를 풀어 네 몸속에 오래 흐르게 하리
낯선 것에 길드는 동안
하얗게 얼어 있던 그리움의 뇌수는 그어놓은 분계선을 넘어 너를 깨우고
목말라 있던 너의 심장을 돌아 늑골을 텅텅 울리며 흐르게 하리
늘 너의 발목을 잡아 돌던 원심, 그 점을 반으로 갈라 바다에 띄우고
파도가 숨죽일 쯤에 가만히 말하리
그리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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