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리 포맷

 

컴퓨터가 말썽입니다. 백신프로그램을 돌려도 잠시뿐, 속도도 떨어지고 특히 자꾸 자동 업데이트로 돌아가니 꼭 사용해야 할 때는 난감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중 제일 큰 걱정은 순식간에 파일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지요. 제대로 백업도 안 해놓은 상태에서 초기 시들을 몽땅 날려버리고 화가 나서 며칠을 끙끙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날아가 버린 시들을 되살리겠다고 욕심부리다 돌아오지 않는 문장들의 배신으로 많은 불면의 밤을 보낸 적이 있었지요. 오래전 컴맹에서 겨우 탈출했을 때의 일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식은땀이 절로 납니다. 투덜대는 나를 위해 아이들이 결정한 바 리 포맷하기로 했습니다. 리 포맷하고 윈도를 다시 깔면 가볍게 본래의 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17년 마지막 날입니다. 다시 작년을 승화시키기 전에 집안도 리 포맷을 하기로 했습니다. 온 식구가 아침부터 분주합니다. 컴퓨터에 쌓인 묵은 찌꺼기들만 청소할 것이 아니라, 미루어 왔던 대청소를 하기로 했습니다. 언제 그렇게 그러 모아놓았는지 몇 년 동안 손 한 번 대보지 않은 물건들.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내 것이라고 딱지 붙은 알쏭달쏭한 것들이 먼지를 쓰고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습니다. 일단 부엌살림이며 옷가지 신발 등등 오랫동안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보기 싫은 것들부터 정리해서 가차 없이 도네이션 하기로 했습니다. 

 

매년, 특히 이맘때면 물건을 살 때 꼭 열 번씩만 생각하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건만, 한 달 두 달 지나다 보면 도로 아미타불 먼지가 쌓이듯 자연스럽게 예년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갑니다. 물론 믿고 싶습니다. 그때그때 필요하다고 열 번 생각해서 집으로 데려온 것들이라고요. 
 커튼은 내려서 먼지를 털었습니다. 마른 걸레질과 청소기로 대충했던 마룻바닥은 오랜만에 무릎 꿇고 물걸레질을 합니다. 창틀이며 선풍기 날개들도 사다리를 이용해 먼지를 닦습니다. 예전에 도와주었던 하우스 키퍼를 부를까도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온 가족이 마음의 때를 벗기듯 서로의 등을 밀어주듯 함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역할 분담을 하니 웃으며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불이 나간 전구들은 새것으로 교체하고 알전구 위에 쓰인 갓들은 차가운 겨울바람에 흔들어 먼지를 털고 잠에서 깨웁니다. 
 

이렇게 서너 시간을 쉴새 없이 움직이고 나니 집안은 생각한 만큼 생기를 찾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문들을 활짝 열어 찬바람으로 환기하자 내 속까지 환해집니다. 하지만, 말끔해진 집안 공기와는 달리 내 몸은 천근만근 안 아픈 곳이 없습니다. 손가락 마디마디부터 무릎 관절 허리 적당하게 사용하던 근육을 호되게 부려먹었나 봅니다. 오십 년 사용한 내 몸도 내 마음도 리 포맷을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몸에 익은 나쁜 습관은 과감하게 버려야 할 때입니다.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잡다한 생각들도 비워내야겠습니다. 얼마 못 가 몸도 마음도 느슨해지겠지만, 시작은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빼빼 마른 체구 덕에 아직 매일 먹어줘야 하는 약은 없다는 것이지요.
 컴퓨터에 백신프로그램을 열심히 구동시키듯 나에게도 백신 처방을 내려 그때그때 안주하려는 문제들을 열심히 털어내야겠습니다. 
디지털 파일이 편리하지만,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면 손쓸 방법이 없고 삭제되면 흔적도 없어 늘 불안하지요. 그렇듯 익숙해진 것들로 방심하고 있을 때 그 틈으로 불상사가 들이닥친다면 복귀할 시기를 놓쳐 암흑의 시간이 도래하겠지요. 물론 잃어버린 문장들을 더듬다가 뜻밖의 언어들이 반짝반짝 손짓한다면, 새로 난 샛길에서 뜻밖의 아름다운 시를 만나기도 하겠지요. 그건 설레는 일입니다.
 울음으로 벽을 쳤던 마음의 방, 그 벽도 허물고 새로운 인연을 맞을 수 있도록 음표가 많은 악보로 채워 단장해야겠습니다. 참 중요하다 싶어 버리지 못하고 간직했던 자료들이나 옷가지들도 몇 년 지나 들춰보면 순간의 조바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놓아야 하는 인연도 그렇지요. 놓고 나면 편해질 텐데 그걸 못 해서 감정에 상처만 내고 속앓이를 하느라 허송세월하지요. 가슴과 머릿속에 꽉 채우고 있던 쓰레기들을 비우고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대는
세상이 투명하게 얼어있던 그날
최초의 아지랑이를 피워냈다

그대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던
그림자조차 낯설던 시간에
나의 은밀한 성문을 열고 들어와
부들거리는 심장에 지문을 찍으며
꽃을 피우는 것이라 했다

그대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심지를 꽂고
그것은 나의 완벽한 정체성이라 이르며
가장 진한 푸르름을 달아 주었다

나와 멀었던 나를 불꽃 이게 하고
차갑게 굳어 있던 마음에 환한 회로를 돌려
고독의 성을 녹이어 다시
나로 태어나게 했다

그대는 
나의 곱은 손을 감싸 쥐고
언어는 굳이 필요치 않은 거라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김미희, (리 포맷)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