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제19화 이스라엘의 마사다와 백제의 황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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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많이 찾는 성지순례 코스는 단연 이스라엘이다. 그 중에서도 유대 광야에 솟아있는 마사다(Massada)는 방문자들을 놀라게 한다. 마시다는 요새의 뜻이다. 요새(要塞) 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만들어 놓은 방어 시설을 말하는데 유대 광야에 있는 이 마사다는 높이가 해발 450m의 거대한 원기둥을 잘라 놓은 듯한 모습이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960여명의 유대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밀을 간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사다 이야기는 요세푸스(AD37~100 로마제국시대의 유대인 정치가 역사가)가 쓴 <유대전쟁사>에 전한다.
 마사다는 BC 37년부터 31년 사이에 해롯 왕이 자신의 학정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언제든지 도망가서 살 수 있도록 만든 요새 겸 왕궁이었다. 마사다 정상은 길이 600m, 폭 250m의 평평한 땅으로 되어있어,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 수 있었다. 마사다에는 수천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창고, 물탱크, 살림 집, 무기창고, 학교와 회당까지 있었다고 한다.
 
 A.D. 66년 로마제국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통곡의 벽만 남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계속 로마 군에 저항하였으나 견디지 못하고 AD 73년에 엘르아살 벤 야일(Eleazar Ben Yair)의 지휘 아래 약 960명이 마사다 요새로 피신을하게 된다. 로마는 1만5천의 군대를 보내어 마사다를 조기 함락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좁은 통로는 로마군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로마군은 하는 수 없이 유대인 포로를 동원해 절벽의 경사로를 완만하게 하는 토담을 쌓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드디어 성을 공격하기 위한 성채가 마련되자 로마군은 공성기(攻城機: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이용해 성벽일부를 깨뜨리고 요새로 진격해 들어갔다. 마사다에 로마군이 주둔 한 지 3년 만이었다.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마사다에 살던 유대인들의 싸늘한 주검뿐이었다. 식량창고를 제외한 요새 안의 모든 건물이 불탔고 엄청난 수의 시체들이 즐비했다. 마사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로마 군의 공격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어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의 지도자였던 엘르아살이 말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이여, 로마인들에 항복하여 노예로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자”고.유대인 율법은 자살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자살하지 않는 방법으로 그들을 서로 죽였다. 우선 가장들은 그들의 가족을 먼저 죽였다. 그들은 이미 죽은 부인과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을 내밀었다. 마지막 열사람 가운데 다시 한 사람을 제비 뽑아 아홉 명을 죽이고 최후의 1인도 자살하였다.(이 제비뽑기 방법이 요세프스 계산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죽고 죽이기 전에 집과 소유물을 모두 불에 태웠다. 그러나 식량창고에 식량을 그대로 둔 채였는데 최후까지 자신들이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한 것이지 먹을 게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유대 율법은 자살은 안 되고 타살은 된단 말인가. 이렇게 끔찍한 일을 겪은 마사다는 유대광야의 시간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비극은 1842년 고고학자들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고 1963년 이스라엘 정부의 마사다 복원 정책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헤롯 왕의 두 개의 궁전과 빗물을 저장했던 거대한 수조, 로마식 목욕탕과 유대 반란군의 막사, 영양섭취를 위해 비둘기를 사육했던 흔적도 발견되었다. 2000여년 동안 마사다가 잊혀졌던 것은 그만큼 이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험난했기때문이리라. 현재 마사다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고 관광지로 세계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계백의 황산벌 비극
 계백 (階伯 607-660)은 결단의 시간이 다가 옴을 직감하고 있었다. 전운에 쌓인 백제의 하늘은 이제 피바람이 불것이다. 그는 꽃같은 아내와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한 나라의 군사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칼을 들었다. 아내와 어린것들이 차례로 그의 칼에 죽었다. 계백은 피묻은 칼을 들고 황산벌에 섰다.
 신라의 삼국통일의 야망은 그 끝을 치닫고 있었다. 660년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수군과 신라의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 육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를 침공했을 때, 의자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은 계백장군만 보고있었다. 계백의 관등은 달솔(2품)이었다. 계백은 대장군으로서 5천 명의 결사대를 뽑아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맞섰다. 계백은 황산벌에 도열한 병사들 앞에서 외쳤다. “월나라 왕 구천이 5천의 군사만으로 오나라의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백재의 용사들이여, 용기를 다해 싸워서 국은에 보답하자”는 말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계백은 황산벌에 백제군을 세 곳으로 나뉘어 진을 치고 전쟁에 임했는데 이는 소수의 군대가 대군을 상대 할 때 쓰는 전법으로 계백의 높은 전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백제군은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겼다.<삼국사기 열전>
 황산벌 싸움에서 신라군은 김유신의 조카 반굴을 전장에 내보냈으나 전사하고, 다음으로 관창이 선봉에 섰다. 그러나 관창은 노련한 계백에게 사로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신라에 이런 화랑이 있다니 이길 수밖에 없겠구나”하고 감탄을 하며 돌려보냈다 한다. 관창이 재무장을 하고 다시 백제군 진영으로 쳐들어오자 계백은 관창을 잡아 처형했다. 관창의 죽음에 고무된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백제군을 공격해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황산벌 싸움에서 계백은 5천의 결사대로 국운을 지탱하려 하였으나 분패하고, 결국 의자왕은 신라에 항복하고 백제는 멸망하였다.
 계백이 신라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는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에 대해서 후대인들은 ‘무도했고 도의에 어긋난 잔인한 처사였다’는 평가 있지만 ‘자기 자신도 결국 전쟁터에서 전사했으니 처자식을 죽인 무도만 가지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는 계백옹호론이 우세하다. 백제의 옛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 지방을 유람한 조선의 시인, 묵객들은 어김없이 계백의 죽음을 기리며 그의 행적을 추모하는 시를 남기고 있다. 현재 논산시에 '계백장군유적전승지(階伯將軍遺蹟傳承地)'라는 이름으로 충장사(忠壯祠 충청시도기념물 제74호)가 만들어져 계백을 기리고 있다.
 
 계백의 최후는 장려했다. 계백이라는 존재마저 없었다면 백제의 멸망은 얼마나 서글프고 초라한 것이었을까. 마사다 최후가 유대인들의 최후가 아니었듯이 백제의 최후는 최후가 아니었다. 백제는 계백의 혼과 함께 영원히 한국의 혼으로 남은 것이다. 고통이 영혼을 숭고하게 만든 역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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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재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