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박혜자 수필 어느 봄날의 윤회

2018.03.23 11:28

KTN_WEB 조회 수:127

봄.jpg

 

  박혜자의 ‘세상 엿보기’(peek through the window)  

 

어느 봄날의 윤회 <輪廻>

 

봄날에 장례소식을 듣는 일은 우울하다. 삼라만상이 모두 새로 태어나는데, 오직 인간만이 윤회의 억겁을 반복하고 있다. 더구나 아직 인생을 꽃 피워보지도 못한 세대가 극단의 선택을 했단 소식을 접할 경우, 그저 아주 먼 먼 인연이라도 가슴이 아프고 시리다. 하얀 벚꽃 잎은 저리도 꿈결처럼 휘날리는데, 분홍빛 복사꽃 봉우리는 저리도 사랑스러운데, 이승의 길을 떠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갓 태어난 아기들을 축하해 줄 일도 끊임없이 있어, 봄의 윤회 바퀴는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유년의 기억 중 하나도 새봄의 일이었다. 엄마 곁에서 낮잠을 자다 구슬픈 노래 소리에 이끌려 큰 길가 사거리로 나갔다. 그때 처음으로 상여를 보았다. 울긋불긋한 꽃으로 치장한 상여가 지나가고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이~야 디이~야, 이제~ 가면 언제~오나” 하는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상여를 메고 지나갔다. 그들은 맨 앞에서 종을 흔드는 요령잡이의 선창에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걸음을 멈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반복했다. 상여꾼들이 입은 하얀 광목옷이 봄 햇살 아래 눈이 부셨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베옷을 입은 상주들은 더 없이 슬퍼보였다. 난 그 광경에 반해 나도 모르게 한 없이 상여꾼들을 따라 갔다. 

 

이윽고 출발했던 곳에서 한 참 떨어진 야산 부근에 상여꾼들이 관을 묻고 막걸이를 마신 다음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때서야 난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내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의 일이니 예닐곱 살 쯤 되었을 것이다. 해도 지는 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모르는데, 그 동네 사는 조무래기 들 까지 길을 막고 있어 한 참을 울었던 것 같다. 다행히도 그 부근을 지나가던 아줌마의 도움으로 집 앞 사거리 까지 오게되었는데, 그때 멀리서 엄마가 내 이름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저승에서 이승으로 나를 건네는 소리 같았다. 엄마 품에 안겨 엄청 혼이 난 그 봄날 저녁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해마다 봄이 되면 그 꽃상여를 따라갔던 유년의 기억이 새삼스러운 것은 꽃잎처럼 반복되는 ‘봄날의 윤회’ 때문이다.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여자아이가 걸어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 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 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는 가만 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배 한봉 -복사꽃 아래 천년 전문-

 

봄은 천년을 걸어가는 신발 속의 꽃잎인지도 모른다. 그 신발 속에서 나의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 다가올 미래의 손주가 걸어 나온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처럼’ 다가올 아이의 손에 꽃잎을 쥐어주는 사랑이고 싶다. 떨어지는 꽃잎은 존재를 통하여, 복사꽃과 여인들과 봄날과 온 우주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역사적 현재와 무시간성을 연결해 주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관념과 기억속의 시간이며,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유한한 인생과 무한한 우주의 진리를 엿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신발 속에 쌓인 꽃잎 때문에 차마 신발을 신지 못하는 시적화자들이 맨발로꽃 길을 걸어가고 있는 봄이다. 누구든 만나면 환하게 웃어 주리라, 이 봄도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
 

B049.pdf 다운받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