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박혜자 수필 우수 (雨水) 무렵

2018.02.23 14:45

KTN_WEB 조회 수:124

  [ 칼럼 ] 박혜자의 ‘세상 엿보기’(peek through the window)  

 

우수 (雨水) 무렵
 

어제는 밤부터 천둥번개와 폭우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침대 발치에서 웅크리고 자던 강아지 토토는 천둥소리와 번쩍이는 불빛을 보더니 놀랐는지, 방바닥으로 내려갔다 올라오기를 반복했습니다. 창가에 몰래 핀 수선화를 본다며 낮에 브라인더를 열어놓고 닫지 않은 게 실수였습니다. 토토 눈에 놀라움으로 다가온 뇌성과 번개는 깊은 잠에 빠져있던 겨울을 깨우는 죽비 같은 소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잿빛 들판과 꽃 한 송이 볼 수 없는 긴 겨울, 칩거에 들어간 다람쥐처럼 인적이 드문 산방에서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읽으며 지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내일에 나날은 시들어가는 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천지에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찾아오고, 개구리가 생의 합창을 부르는 경칩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월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과 같습니다. 겨울의 마지막들이 포화직전으로 팽배합니다.
나쁜 뉴스들과, 변덕스런 일기와 독감, 세탁소로 갈 두꺼운 패딩 잠바와 털신, 봄꽃들을 기다리는 빈 화분들이 그렇습니다. 지난주일, 모처럼 센트럴 마켓과 pottery barn 에 들려, 레즈베리 향이 나는 커피와, 이스터 토끼 그림이 들어있는 살라드 접시 4개를 사왔습니다. 그 가게 안은 이미 봄 이어서, 냅킨 하나에도 풀밭을 뛰어다니는 토끼와 갖가지 모양의 에그가 장식용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 살라드 접시는 푸른 체크무늬 디너 접시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접시 위 토끼들은 모조리 ‘어 벌써 봄이 왔네’ 하는 표정들로 놀란 토끼 눈이 어떤 눈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갖가지 다른 표정들이 재미있는 그 접시들은 지금 식사용이 아닌 장식용으로 집 안 곳곳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사방에 눈꽃이 피었습니다. 휘청거리는 소나무 위에도, 레드 카디널이 앉아있었던 앙상한 가지에도, 들판에도, 하얀 무서리가 내려앉았습니다. 이 짧은 이월 한 달 동안 들판은 갖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수도승처럼 늘 그 자리를 지키던 까만 소들조차 오늘은 보이지 않습니다. 추위에  낡은 외양간 지붕 안으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 가득 채워둔 허밍버드 수액이 물에 젖어 바람에 흔들거립니다. 징크스처럼 수액을 채운 날엔, 오랜만에 카 워시를 한 날처럼 항상 비가 내립니다. 

지난겨울 레드 카디널 먹이를 새집에 놔두었더니 까마귀들이 단체로 날아와 모조리 먹어 버려 속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홍관조라 불리는 이 새는 털색이 추기경들이 입는 주홍빛 수단과 비슷해서 이름이 Cardinal 이 되었다고 합니다.
새들의 세계에서도 보통 새 들은 무리지어 다니는데, 레드 카디널은 드문드문 한 마리 아니면 두 세 마리만 고고하게 날아다닙니다. 귀한 것은 흔하지 않다는 법칙을 말해 줍니다. 한 동안 고가였던 핸드백이 한국에 나가보니 3초 백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3초에 한 번 꼴로 여자들이 들고 다니는 뜻이라네요. 물론 모두 오리지널 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고급스러움의 기본은 희소성에 있는 것 같습니다. 레드 카디널이 까마귀떼처럼 몰려다니면 글쎄요, 좋아할지 모르겠습니다.

 

눈 오는 날이 귀한 텍사스에서 올해는 티브이로나마 눈을 실컷 구경했습니다. 평창 올림픽을 통 해서지요. 평소에 고국의 산야를 많이 안다고 여겼는데, 미국방송에서 촬영한 경기장 부근을 보니 새삼 우리나라 산들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강릉 경기장 부근의 바닷가는 웬만한 세계적 휴양지 보다 멋있습니다. 대회 초반 클로이 김 선수의 활약과 환한 웃음이 인상 깊었고, 남북이 하나 된 하키 선수들도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한국사람들 특유의 흥과 정, 친절로 각국의 참가자들이 베스트 윈터 올림픽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 합니다.사실 우리나라는 엄청 매력 있는 관광지 임에도 불구하고, 잘못 알려진 게 더 많은 관계로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니었습니다. 이곳 메인 채널에서도 코리아에 관한 것은 주로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분단국가의 모습이나 북핵과 김정은, 아니면 개고기에 관한  뉴스 등 부정적인 것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을 한 번이라도 방문한 외국인이라면 다양한 먹거리와 친절함, 오 천 년의 빛나는 문화유산과 최첨단 하이테크가 공존하는 아주 다이내믹하고 매력 있는 나라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어느 외신기자는 올림픽에, 무장한 군인이나 30분 거리에 있다는 북한만을 상상하고 왔다가 총은 구경할 수도 없는 평화스런 모습에 아주 놀랐다고 합니다. 

 

사실 정말 위험한 나라는 총을 장난감처럼 쉽게 살 수 있는 나라, 세계의 파수꾼임을 자처하는 미국이지요. 하루걸러 총격사건이 벌어지고 무고한 인명이 수 없이 희생되는 데도 총기 규제가 현실화 되지 못하는  이곳, 자본주의의 메카 미합중국 이지요. 소위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 전미총기 협회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에 뿌린 돈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수많은 아이들이 무고하게 죽어가는 데도 주류의 빽을 믿는 총기 상 들은 총을 구입할 수 있는 연령대를 더 낮출 무서운 궁리만 하고 있으니, 헨리 데이빗 소로우 처럼 ‘시민의 불복종’ 이라도 강력하게 외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저 두꺼운 얼음을 깨는 물처럼, 부드러움으로 생명을 일깨워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비의 향기가 온 천지에 가득한 이즈음, 비 내리는 ‘재의 수요일’ 과 시냇물 졸졸졸 흐르는 소리와 차가운 땅 속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구근들이 내는 아우성 소리를 듣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처럼 우당탕탕 묵은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신선함과 파격으로 진부하지 않는 봄을 맞고 싶습니다. 우수 무렵에 듣는 비 소리는, 다름 아닌 생의 결빙(結氷)이 해제되는 소리입니다. *

 

박혜자
시인 /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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