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연작중편 / 土(원시의 춤)舞  <제37회>

제4화 / 밀림 야화(野話) 

 “라면하고… 나시꼬랭(볶음밥의 일종)이라요. 여기서는… 안 묵으면 체력이 금방 딸리니까 자기 손핸기라요 백대리… 그거 꺼내라”
 박기사가 철민을 한번 힐긋 쳐다보며 뭐가 우스운지 키득키득하다가 백대리의 주머니를 툭 쳤다. 백대리는 기다렸다는 듯 죠니워커 한 병을 정글복 주머니에서 꺼내 탁자 위에 놓고 마치 제방처럼 익숙하게 냉장고로 가 얼음과 술잔, 스펨 등 안주를 꺼내왔다.
 자요! 
 박기사가 맥주 글라스에 반쯤이나 넘게 술을 따르더니 불쑥 철민에게로 내밀며 냄비 뚜껑을 열었다. 구수한 라면 냄새가 순식간에 철민의 식욕을 자극하며 퍼져 올랐다. 그는 암말 없이 박기사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알콜이 식도를 타고 흘러드는 짜르르한 느낌이 온몸을 자글거리게 했다. 그리고 그는 냄비를 통째로 들어 국물 몇 모금을 후르륵 들이켰다.
 빈속에 들이부은 술이 잠깐사이 속을 화끈거리게 하며 희한하게도 조금 씩 조금씩 신경이 안정되는 느낌이 왔다. 그는 빈 술잔을 들어 박 기사에게 돌리며 나머지 빈 술잔에도 술을 채워 백 대리에게 건넸다. 백대리가 술잔을 받아 옆으로 밀치며 우선 할 일이 있다는 듯 부시럭 부시럭 호주머니를 뒤져 접은 백지 한 장을 꺼내 놓았다.
 “뭐야, 그건?”
 “답장요”
 그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뭐라 썼어?”
 “그냥… 너희 편지 잘 받았다, 하지만 우리 입장은 너희 생각만큼 해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아무튼 내가 새로 부임했는데 한번 만날 기회를 갖자, 장소와 시간은 너희가 정해라 등등… 그런 내용이고… 이사님 이름으로 썼어요”
 그리고 그는 편지지를 철민에게 건넸다. 그는 술잔을 홀짝거리며 글도 모르는 편지 내용을 물끄러미 훑어보다가 뚜벅 그들에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전해주요?”
 “그냥… 이사님 방문 앞 창틀에다 꽂아두면 누군가가 갖고가요”
 “누군가가? 그러면… 지켜서 있다가 잡으면 될거 아뇨?”
 철민이 초등학생처럼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갸웃하자 백대리가 풀썩 웃었다.
 “잡아서… 뭐하게요?”
 “……?”
 “잡아본들… 그래서 이곳 경찰 파견대에 넘겨본들… 뭔 소용 있겠어요? 오히려 분란만 생기고 나중에 그 탓에 해코지만 당할 수도 있을텐데…”
 이어서 박기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이번 일 해결되면 며칠 있다 바로 한 보름 그라운드 서베이 들어가야 돼요. 임도 연장 현장조사도 미리 해야 되고...그러려면 우선 그놈들과 이사님이 먼저 상견례를 하고 뒷구멍으로나마 그놈들의 허락을 받아야 되요. 정부 허가서는 놈들에겐 말짱 헛것이거덩요”
 “보름동안 그라운드 서베이 들어간다고? 그럼 나도 가봐야겠네. 그런데...그들 승인이 필요하다고? ”
 “그래요. 그때 한꺼번에 임도연장선 사전 조사해놔야지 끝나면 바로 장비 투입해야 되니까...그네들이 즈네 졸개들에게 못건들게 하는 거지요. 이사님...가시면 좋긴 하지만,..고생 좀 하셔야 할겁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철민은 잠시 눈알만 디룩거리다 뜬금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라운드 서베이 가면... 산거머리가 그리 많다메? 황이사가 그러대?”
 “많지요. 나뭇잎 밑에 붙어 있다가 사람 지나가면 귀신같이 달라붙어요. 처음엔 실같이 가는데, 나중에 보면 통통해져요. 피빨아서...”
 백대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어떻게 떼내나? 눈에도 들어간다메?”
 “눈에는...가끔. 그냥...담배불로 지지던가...그러지요”
 박기사가 백대리를 밀치며 끼어들었다.
 “그거 뭐... 별거 아입니다. 보통 서베이 들어가면 흔히 있는 일이니까...그보다 이사님 여러가지 걱정하는 심정… 이해합니다만…기왕 여기 오셨으니 그러려니 하고 상황 닥치면 그때그때 최선 아니면 차선으로 넘어가는 것도 지혜라고 생각해요 저희들도 처음엔 왈가왈부 많은 토론을 했지만… 결론이 그거라요 또 죄송치만 이 바닥 경험이고요”
 그들은 완전히 산적들 편인 것처럼 마치 철민을 설득하러 온 사람들 같았다. 생각해 보면 본사 고위층의 측근으로서 그룹의 왕자란 별명이 있었을 만큼의 도련님이 불쑥 이곳에 와서 천방지축 아무 것도 모른 채 FM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다 혹시나 자기들 신상에 불상사라도 벌어질까봐 솔직히 속으로 겁들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들은 이미 현실에 길들여져 있는 셈이었다. 철민은 암말 없이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라면과 국물과 볶음밥이 동이 날 때까지 그들은 별 얘기도 없이 착잡한 심정으로 죠니 워커 한 병을 몽땅 비워버렸다. 
 철민은 잠깐 생각을 모아보았다. 사람이 살아가며 참으로 별별 처지를 겪고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 와중에서 때로는 좌절을, 때로는 ‘해냄’의 환희를 맛보기도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적어도 남에게 내 목숨을 내놓고까지 달려들었던 상황은 아닐 것이라 싶었다. 만약 누군가 그러기를 강요한다면 아마 서로가 등을 돌리든가 원수를 지고 말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바닥의 현실은 적당히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며 지내다가 잘 되면 내 공로요, 못 되어도 그만이지 하는 생각들이 온 캠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날더러 까불지 말라 이거지. 
 철민은 직원들이 돌아가자 착잡한 심정으로 침대에 누웠다가 가슴이 답답해 창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훅하니 밀려드는 바깥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고 산 속엔 자가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만 퉁퉁퉁퉁 캠프 광장을 두드리고 있을 뿐 여기저거 거뭇거뭇 보이는 숙소들은 마치 도깨비 집들처럼 괴괴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자 하늘엔 하나 가득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슬글 슬금 캠프 광장을 가로질러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몇군데 숙소에서는 마치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알전구가 창문을 통해 감빛을 뿜어대며 흐릿하게 언저리를 밝히고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자 숙소 난간에 몇몇 현지 노무자들이 윗 통을 벗어던진 채 얘기들을 나누고 있다가 철민이 다가가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슬라맛... 삐삐난 (어서오세요, 두목)”
 “안녕하세요”
 철민은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동안을 헤매다 가까운 한국인 직원 숙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에서는 고스톱이라도 치는지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리며 열어젖힌 창문 바깥으로 마치 굴뚝처럼 담배연기가 뭉클뭉클 뿌옇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문 앞에 잠간 섰다가 왠지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흔들며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문득 서울의 아내와 꼬마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그렇게 그는 황당한 심정으로 또 한밤을 지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