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연작중편 / 土(원시의 춤)舞  <제38회> 

 

 제4화 / 밀림 야화(野話) 

 


 2 

 

 새벽 5시. 자명종 소리에 철민은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났다기보다는 어제 밤도 저녁 내내 가수 상태에 있다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는 밤새 온갖 황당하고 단편적인 꿈속을 헤맸다. 느닷없이 며칠 전 익사한 죽은 직원이 헤엄을 치며 자기를 부르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고 밀림 속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앞을 가로막는 기분 나쁜 장면도 들어있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 집에서 아이들과 놀던 중 아내가 엉뚱하게도 게릴라 대장이랑 사람과 함께 불쑥 나타나 황황히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지는 황당한 꿈도 꾸었었다. 누구 말마따나 기가 약해진 탓일까? 철민은 머리를 흔들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아침 공기가 새어들 듯 실내로 들어와 앉으며 그나마 조금씩 얽힌 기분을 풀어주고 있었다. 캠프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숲은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무수한 나뭇잎들이 제가끔 너울거리며 아침 이슬로 세수를 한 듯 은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철민은 손바닥으로 푸석한 얼굴을 고양이처럼 쓸어내리며 탁자로 걸어가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어제 아침에 받았다는 게릴라 대장의 답장에 눈을 주었다. 봉투 위에 부전지로 붙어있는 백 대리의 메모엔 알맹이의 내용이 이렇게 요약되어 씌어져 있었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ㅡ당신 답장 잘 받았다. 명일 새벽 6시에 만나자. 올 때는 필히 Mr.백과 함께 오되 3명 이상이 넘지 말 것이며 약정된 지원금도 지참하길 바란다. 우리는 그 신세를 잊지 않을 것이며 우리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영수증을 발급할 것이다. 신의 가호를…
 임시정부 좋아하네. 
 철민은 저절로 한숨이 푹 쉬어졌다. 어제 저녁 권대리 시신 운구차 자카르타까지 출장을 다녀온 정부장, 박기사, 백대리서껀 모두 다시 모여앉아 대책회의를 했지만 이미 어쩌구 저쩌구 할 뾰죽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냥 돈 준비하고 아침 일찍 그들을 만나 앞으로 도와달라고 엉기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최선인 것 같았다.
 “야, 혹 갸네들 총 들이대고 납치라도 하면 어쩌냐?”
 철민이 찜찜한 마음에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을 때 정부장이 머리를 가로 저었었다.
 “그런일… 없을겁니다. 갸네들 가만앉아 한달에 백만루피아씩 받는데 뭐하러 사람 데려가 토벌군 불러들이겠습니까? 마, 마음 편히 가지세요”
 하긴 실리로 따지자면 공연히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손바닥에 땀이 배 나오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일어났습니껴?”
 밖에서 시간 맞춰 찾아온 박기사 일행이 문을 노크했다. 철민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다 말고 문을 열어 그들을 맞았다. 바깥엔 발동을 건 찦에 백대리가 앉아 있었고 박기사는 정글복 차림인 채 륙색 하나만 달랑 들고 눈짓으로 철민을 재촉하고 있었다.
 “길은… 알아?”
 “그라문요, 얼마 안멀어요…”
 철민이 문 앞을 나서며 묻자 박기사가 무뚝뚝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게 그들은 마치 사지로 들어가듯 각오를 새로이 한 채 길을 떠났다. 그리고 철민은 덜컹거리며 산길을 내달리는 찦에 앉아 참으로 별별 생각을 다 했었다.
 ㅡ사람 일이란 모르잖냐, 차라리 유서라도 한 장 써놓고 오는걸…
 담배를 피워 물었으나 맛도 알 수 없었고 오히려 빈속에 블랙으로 먹은 커피가 속을 쓰리게 하며 카페인 작용을 하는지 손까지 가늘게 떨렸다. 흥분인지 두려움인지가 한데 뒤섞여 영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반면 박기사는 태평이었다. 속은 어떤지 몰라도 겉보기로는 아주 늠름해 뵈는 것이 철민이 보기엔 이곳의 두목은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인 것 같아 쓴 웃음이 올라왔다. 철민은 잠깐이나마 침묵이 부담스러워 괜스레 그를 집적였다.
 “박기사?”
 “예에”
 “당신… 군대… 어디 있었어?”
 “강원도요”
 박기사가 철민의 마음을 읽었는지 흘깃 그를 쳐다보며 이어서 불쑥 농담을 한마디를 던졌다.
 “이사님요?”
 “......?”
 “제가 말이요, 옛날에 군대 있을 때 여군 하사 하나를 꼬셔 묵은적이 있거덩요」
 “......!”
 “그런데요, 그 가시나가 처음엔 지가 계급 높다고 반말 찍찍해대며 디지게 눈에 힘을 주더라구요”
 “……?”
 “그라다가… 우째우째 내한테 꼬시켜서 여관을 갔는데… 한참 그짓을 하다가 홍콩갈만 할떄 내가 마 팍 빼뿌맀거덩요”
 “그래서?”
 백대리가 킬킬대며 철민 대신 물었다.
 “갑자기 그 가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떠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물었지요, 가시나 니 이래도 하사가? 그랬더니 그 가스나가 뭐라고 했게요?”
 “뭐랬는데?”
 “아아 아이다, 아이다, 나 하사 아이다, 그라문서 내 물건을 콱 붙잡고 사정을 하더라니까요”
 “예라 이…”
 철민이 풀썩 웃음을 터뜨리자 박기사가 정색을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요, 야네들도 벨거 아니라 생각하시고… 긴장 푸시라고요. 야네들은 어차피 돈 갖고 쇼부봐야 되니까… 다부지게 마음 잡수시라요”
 박기사는 엉뚱하게 얘기를 이 상황에 끌어다 붙이며 담배 한 대를 새로이 붙여 철민에게 건넸다. 그 사이 햇살이 본격적으로 밀림 위로 퍼지기 시작하며 숲 안개가 조금씩 조금씩 그 자락을 걷어내고 있었다. 박기사의 표정으로 보아 그들과 약속한 장소에 거의 다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드문드문 바위가 방석처럼 퍼져있는 한 장소에 이르자 이윽고 백대리가 차를 세우며 철민을 돌아보았다. 
 “내리시죠!”
 철민이 암말 없이 어금니를 주근주근 씹으며 조용히 차문을 열었다. 어디선가 피리릭 피리릭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그들 간의 신호음이란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저만치 숲 속에서 무슨 물체인가 휙 지나가는 것이 얼핏 비쳐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