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한인 작가 꽁트 릴레이]

 

“깜짝이야, 기척이나 좀 하시지요!”

 

병태가 산사(山寺)행을 결심한 것은 그 해 가을,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두고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하필 세상 시끌한 시기에 복학을 했다. 어쩌다 대모대에 휩쓸렸다. 그러다 잡혔다. 정학을 당했다. 이유가 황당했다. 전공이 ‘빨갱이 양성’하는 사회학과라 질이 나쁘고, 돌멩이를 던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월 제대 군인임을 감안(?)하여 형사 처벌대신 학교가 책임지고 조치하라는 교육부 지침에 따라 정학처분에 처해졌다. 

 

기가 찼다. 그야말로 암담한 나날이었다. 그는 왼 종일 하숙방에 처박힌 채 잠을 자든가, 아니면 하릴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수음을 하곤 했다. 무슨 욕정이 일어나서가 아니었다. 정말 할 짓이 없어 심심해서 그 짓을 반복했다. 마치 사선으로 돌격하는 병사처럼 이를 악물고 그는 ‘분풀이’ 하듯 죄 없는 ‘그놈’을 학대했다. 나중엔 하체가 뻐근해지며 입 안에서 단내가 나고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그리고는 고자녹용 고아 먹듯 애꿎은 담배만 줄치기로 피워 댔다. 천정의 사방 무늬를 가로 세로로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등산이나 낚시질을 간다든지 하는 명상(冥想)적인 일을 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그렇게 뒹굴고 있다가 아무 것도 모르는 시골집에서 몇 푼 하숙비라도 부쳐져오는 날이면, 그 길로 곧장 친구들을 불러내 걸신들린 놈처럼 술이나 퍼 먹는 게 일과였다. 

 

술이 취해 고래고래 악을 쓰다가 아무 여자나 붙잡고 아무 곳에서나 자빠져 자는 것이, 마치 일상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여자를 사서 파묻혀 지내는 것도 한두 번이나 신통한 일이었지, 녹슬어가는 그의 정신을 전도시키기엔 쥐뿔이나 조금도 도움이 안 되었다. 한 번은 그 짓을 하다가 씨앙! 장가나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골 어머님께 편지를 보냈다가, 졸업하고 취직하면 어련히 보내주겠냐는 가족들의 간곡(?)한 만류로 좌절되었다. 광화문 네거리를 오줌 질질 싸대며 건너가다가 순경 아저씨에게 치도고니를 당한 일도 있었고, 어떨 땐 면도칼로 아예 고추를 잘라버릴까 하는 끔찍한 생각도 했다. 
병태는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신도 딱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제 정신이 나면 곰곰 반성도 해봤다. 허나, 그것은 오히려 짜증과 분노만 유발할 뿐이었다. 

 

내가 뭣 때매 뭘 잘못했나? 그는 수시로 이빨을 갈아 보았지만별 신통한 해답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빈둥거리며 허송세월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정말 급작스럽게 이 현실은 좀만큼도 그의 방황을 알아주지도 않으며, 되레 지금까지 그가 저질러온 행위는 어느 모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깜짝 깨달았다. 일테면 좌절로써 일어나는 이따위 방탕 놀음은 식민지시대의 유물 같은 것임을 새삼 느꼈다고 할까. 그것은 마지막 등록금이라는 단서가 달린 어머니의 등기편지를 받고서였다. 무심히 우체국을 돌아 나오던 순간의 깨달음이었다. 
일금 십만 원. 봉투 속에 ‘언문 날림 체’로 쓰여 있는 어머니의 편지에는, 이제 마지막으로 이 돈을 부치게 되니 시원섭섭하다는 그녀의 주름 깊은 사랑이 눈물처럼 담겨있었다.

 

-아! 오마닌 암것도 모르고 있지 않는가. 병태는 짧게 신음을 뱉어 내며 일순 아뜩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또 다른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막연한 생각만 머리에 가득할 뿐, 10만 원짜리 수표장만 꼬기작거리며 그는 새로운 방황 속에 젖어들었다. 더구나 그와 더불어 그의 뇌리를 비집고 들어앉는 갖가지 상념들-수건을 질끈 동여맨 동료들의 함성, 노안에 물기를 머금던 교수님의 얼굴, 능글대던 취조관의 눈망울, 쾅쾅 책상을 두드리며 마구 들이덤비던 동료들의 절규들...이 눈앞에서 귓가에서 슬몃슬몃 떠오르고 맴도는가 하면, 어머니의 주름 깊은 얼굴이 밤낮으로 그를 따라다녀 입맛을 잃게 하고 잠을 설치게 하는 것이었다.

 

-정면 대결. 복수다! 
그러다가 돌연히 떠오른 말이었다. 입술이 허옇게 부르트도록 며칠 밤을 뒤챈 끝에 생각난 말치곤 꽤나 한심했지만, 그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후다닥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았다. 일테면 통쾌한 설욕은, 이 현실에서 가장 인정받는 법관이나 고급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지금까지 그가 당한 좌절을 보상 받는다. 이것이 ‘지상 목표’처럼 머리에 똬리를 틀었다. 그 생각은 은연중 스스로의 마음을 지배하며 순식간에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대망의 목적은 못 이룬다 할지라도, 그것을 향한 노력의 과정은 훗날 자신의 앞날에 어떤 도움 정도는 줄 것이라는 황당한 자기합리화에 빠졌다. 
아! 허나 그따위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당시 그는 미처 깨달을 수가 없었다. 아니, 깨닫지 못했다기보다는 그러한 결론은 자신의 너무나도 단순한 얼빠진 순진무구함 때문이었다. 

 

병태는 불현듯 이러한 마음의 결정이 내려지자 공연히 성급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마음이 변할 것 같았다. 곧바로 서점엘 들러 고시 준비에 필요한 책들을 몽땅 사들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 저녁으로 법대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조용한 암자를 수소문하여 데꺽 행선지를 정했다. 송별회랍시고 가까운 친구들 몇을 불러 심경의 변화를 광고했다. 마치 큰 결심이나 한 것처럼 횡설수설 지껄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결심을 공고히 해두고 싶었다. 말하자면 주변의 동료들에게 산사 행을 미리 못 박아둠으로써, 스스로를 구속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녀석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눈치들이었다. 그러나 술이 몇 순배 돌고 취기가 오르자 아주 화통한 결심을 했다고 어깨까지 두드려 주었다. 그러면서도 저마다의 억하심정들을 토로하느라 결국엔 술판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짐을 쌌다.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은 일금 4만여 원. 책값과 술값과 밀렸던 하숙비를 제한 것이었다. 물론 그의 이러한 결심은 사전에 가족들의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돈도 돈이려니와 시골 어머니가 이 일을 알면 졸도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잘 되면 판검사나 사무관쯤…운 없으면 그 밑천으로 대서방이나 차릴까? 떠그랄…

 

병태는 이러한 심정이 되어 담배를 꼬나문 채 훌쩍 시외버스에 오르고 말았다. 
허나, 과거 시험에 오른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과 행동이 여간 독하지 않으면 결코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왜냐면 그가 그때 두 해 동안 절집 별채에서 한 짓은 옛날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빈둥대며 아랫도리나 학대하거나 기껏 주지스님 상좌 중들을 꼬셔 술이나 퍼먹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험에 낙방할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중 가장 황당했던 일은 두 번 째 낙방 발표가 있었던 날이었다. 그는 홧김에 법전을 펼쳐놓고 그 위에다 ‘분풀이’를 했다. 법? 엿이나 묵어라...애매한 ‘그놈’만 혼내다가 하필이면 막내 상좌 스님에게 들켜버렸다. 마침 방문을 벌컥 연 꼬마 스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얼른 문을 닫으며 하는 말, ‘어쿠 처사님 지송해유!’ 하며 킥킥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짓만큼 공부도 ‘분함’을 앞세워 열심히 죽기 살기로 했다면 혹 고시에 패스하지 않았을까....허나, 그때 그는 이렇게 중얼대며 철면피하게 그 자리를 얼버무렸다. 

‘깜짝이야, 기척이나 좀 하고 들오실 일이지, 참, 스님도” *

 

손용상
소설가/달라스문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