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꽁트 코메리칸 따라지 

2018.03.09 14:23

KTN_WEB 조회 수:144

  [꽁트릴레이 ] 한인 작가 꽁트 릴레이  11  

 

코메리칸 따라지 

 

주말에 첫눈이 내렸다. 싸락눈이었지만 순영이 아기를 낳자마자 내린 서설(瑞雪)이었다. 창밖으로 싸라기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곧 본격적 겨울이 다가서겠지...용두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거실에서 베란다로 나섰다. 길거리에, 아파트 뜨락에 잎 떨어진 가지위에 희끗희끗 눈이 쌓여있었다. 동네 아스팔트길은 간밤에 녹은 눈 때문인지 질척하게 젖어 있다. 멕시칸과 흑인 애들 몇 명이 강아지처럼 뛰놀고 있는 풍경이 정겨웠다. 그런가 하면 첫 눈에 사람들은 당황스러운 몸짓으로 자동차에 커버를 씌운다, 현관 앞을 쓰레질 한다…등등 부산하다. 용두는 담배 한 모금을 빨아 당기며 다시 한 번 저만치서 벌어지는 동네풍경을 음미하듯 바라보았다.
-아아, 겨울이구나. 가을 뒤엔 겨울이 있었구나.
용두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며 왜 이제서야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지…참 알다가도 모를 자신의 한심함을 새삼 깨닫는다.
-뭘하고 지냈누?
아침 자명종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까뒤집고 일어나 안약으로 눈을 씻어내고 치카치카 이 닦고 푸아푸아 세수하고 국에 밥 말아 후루륵 불과 2∼3분 만에 뱃속에 털어 넣고 응가하고 뉴스 좀 듣다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와 차를 몰아 거리로 나서면 웬 색색의 인종들은 그리 많은지…그럭저럭 가게를 나와 문 열고 일을 시작하면, 아침부터 이리 부딪치고 저리 볶이며 하루를 보내는 일상. 언제 봄이 지나고 여름이 갔는지, 그리고 가을이 지나 언제 또 이렇게 싸라기눈이라도 내리는 겨울 아침에 서게 되었는지…용두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타다 남은 담배 끄고 꽁초를 비벼 창밖으로 날려버린다.
휘익-바람이 창문을 때린다. 그 바람결을 타고 작은 눈 알갱이들이 유리창에 부딪히며 잠깐 머물다간 떨어진다. 유리창에 엉겼다 똬리지는 맑고 영롱한 이슬방울들이 한순간 번쩍 빛을 발하며 용두를 쏘아보다간 이내 주르륵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아아, 또 한해가 가고 오고…나이만 먹어가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공연히 치밀어 올라오는 뜨거움…용두는 공연히 우울한 마음이 되어 베란다 유리창에 가만히 이마를 붙인다. 유리에서 묻어오는 서늘한 냉기가 오히려 저릿한 느낌으로 가슴을 적셔온다. 이런 날은 짜증나는 세상 얘기 보다는 사실 향기 있는 차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어야 하는데…용두는 뭔가 모자라는 듯한 마음으로 거실로 돌아와 커피 포터에 물을 채운다.
“뭐해요?”
언제 일어났는지 순영이 가운 차림으로 다가와 그의 뒤에서 가볍게 허리를 껴안는다.
“으으…일어났어? 꼬마는?” / “잘 자고 있어요. 물 끓여요?”
“응” / “뭘루?” / “헤이즐럿”
용두는 순영의 차 끓이기를 기다리며 무심코 탁자위에 놓여 진 친구 B의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는 어제 오후 순영이 갖다 주었는데, 그 사이 딴 일에 정신이 빠져 미처 뜯지도 못한 채 그대로 얹혀 있었다. 용두는 순간 친구에게 예의가 아니었다는 미안함에 마음이 아팠다. 그리곤 소파에 몸을 앉히며 B의 편지를 뜯었다. 
친구는 안부와 함께 요즘의 하(何) 수상(愁傷)한 세월 얘기를 곁들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곤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 느닷없이 위정자들의 욕을 거침없이 쏟아 붓다가 편지의 말미는 장난처럼 이렇게 끝나 있었다. 

-용두야, 니 사는 곳은 이 어수선한 세상을 어찌 바라보고 있냐? 그렇다고 옛날처럼 뿔난다고 그냥 또 용두나 주무르고 살진 않겠지?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그럴 땐 나처럼 가끔 법정의 수필도 읽어보며 마음을 수양하고 살길 바란다. 내가 왜 뜬금없이 이런 흰 소리를 하냐 하면, 듣기론 너 사는 동네도 요즘 북의 뚱돼지에게 겁먹은 코리안들이 마이 온다메? 그래 코메리칸 따라지 된 놈들도 많다고 들었다. 마치 삼팔따라지였던 울 아부지 세대처럼 보따리 싸는 사람들이 엄청 늘었다고 하더구나. 기러기 가족도 많고...그렇다고 너도 고향 떨어져 외롭다고 피난민처럼 살지는 말길 바란다. 이 형님의 말을 명심하고 잘 새겨들어라. 운운....
삼팔따라지? 그렇지! B는 6.25 실향 가족이었다. 수양을 하라고? 어쭈, 용두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그와의 오랜 우정이 새로워 그의 장난 같은 말투를 허투로 들을 수가 없었다. 녀석의 글은 이어졌다. 
-법정이 말하더구나.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에 가득 찼을 때보다 오히려 넉넉하다…고. 
용두는 공감을 했다. 물론 위치와 상황은 틀리지만 그분이 느끼는 텅 빔과 지금 자신이 느끼는 허함은 어쩌면 충만을 위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용두는 순영이 가져다 놓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B의 말처럼 법정을 떠올렸다. 
그는 무지막지하게 태풍이 부는 날은 전기마저 나가버린 산사에 홀로 앉아 촛불을 켜 놓은 채 ‘희랍인 조르바’를 읽으며 순수한 ‘내날’을 찾는다고 했다. 불쑥불쑥 느닷없이 찾아드는 불청객들도 태풍 부는 날 만큼은 오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한 ‘나’를 찾으며 속옷 바람으로 홀가분하게 책을 읽는다고 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끝이 있게 마련, 태풍도 불만큼 불다가 잦아질 때가 있으리라. 두려워 말고 짜증내지 말자. 오면 오는 대로 맞아주고 가면 가는대로 떠나보내는 순리 속에서 ‘내 날’을 가짐으로써 텅 빈 마음을 채우는 슬기…
참으로 법정은 범인으로서는 흉내 내기 힘든 도승의 경지였을까...용두는 동시에 B와 오리지널 삼팔따라지로 태풍을 견뎌온 그의 부친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B의 편지를 접었다. 

“울 애기 일났어요…”
마침 용두의 생각을 깨뜨리며 순영이 아기를 안고 나왔다. 용두는 한차례 심호흡으로 우울을 떨쳐버리곤 아기 앞에 섰다. 살짝 볼을 꼬집는 애비가 마음에 안 드는지 꼬마는 얼굴을 찌푸리며 왜애- 울음을 터뜨렸다. 용두는 그 순수의 언어 앞에서 문득 옷깃을 여몄다.
-그래, B군, 우리 맘속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함은 이 꼬마 녀석으로 인해 채워질 것이다. 이 어린 것의 순수한 몸짓이 바로 우리 속을 채우는 충만이 아니겠는가. 자네 부친도 만약 당시에 자네 같은 꼬마들이 곁에 없었더라면 지금껏 뭘 바라고 견디셨겠나? 
아기는 입을 오물거리며 허겁지겁 제 어미의 젖꼭지를 찾아 물며 비로소 울음을 그친다. 감겨진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이 서러움처럼 묻어 있었다. 
-아가야, 아저씨 말마따나 어찌 보면 아빠도 코메리칸 따라지 되어버렸네...그래도 너는 이담에 세상에서 전쟁이니 평화니, 뭐니... 이런 어지러움 같은 거 모르고 잘 자라야 한다. 너희에겐 이 아빠가 절대 그런 걱정 않도록 해줄게. 약속하마. 
용두는 순영의 품안에서 잠든 아이의 눈꼬리를 부드럽게 닦아주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순영이 순한 소처럼 티 없이 웃었다. 용두는 옆에서 가만히 보내주는 그녀의 사랑 담긴 순수의 눈빛에 다시 한 번 공연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손용상
소설가/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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