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 수필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내 마음속의 유턴 (U-Turn)

 

길을 잃었습니다. 멈춰 서서 내비게이션에 입력된 go to home을 눌렀습니다. 유턴을 하랍니다. 욕이 튀어나왔습니다.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한참을 앉아 한탄 섞인 욕지기를 쏟아내고 핸들을 꺾었습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눈물도 따라 나왔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 ‘욱’이라는 놈이 기생하고 있었습니다. 시간 맞춰 들어가야 할 일도 없는데 뭐가 급하다고 잘못 들어섰으면 그저 돌아가면 그만인 것을. 음악을 틀었습니다. 

 

왼종일 도리질하던 해
가로등 위에 온기를 남기고 떠나면
외길 갓집 외등이 켜지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나앉아
잔을 들어 
설움, 외로움을 길어낸다

깁고 기워 누더기 된 마음
잔이 넘치게 담아 비우고 나면
어느새 너는 내가 되고
내 아픔은 네 것이 되고

헐렁했던 마음에
넘치는 정 덜어주고
무거웠던 웃옷 어깨에 걸쳐 맨 채
턱 없는 문지방을 넘어가면
훈훈해진 외진 골목에
새벽별이 내린다

졸시, (어떤 풍경) 전문
 

작년에 이정환 작곡가가 시에 곡을 붙여 만들어준 음악을 찾아 소리를 높였습니다. 흐르는 음악이 옛사람들을 옛일을 불러옵니다. 길가에는 돌배나무들이 보름달 하나씩 머리에 이고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일렬종대로 서서 ‘받들어 총!’을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은 참 좋았습니다. 20년 지기들과 저녁을 먹으며 이슬을 마신 듯 좋았습니다. 넷이 함께 만난 것은 오랜만입니다. 서너 해는 족히 되었나 봅니다. 그 누구의 누구도 아닌 나와 함께 놀면서 좋았습니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나에게서 희망이라는 이파리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을 때였습니다. 너무 추워서 마음마저 꽁꽁 얼었을 때였습니다. 고드름 끝으로 서로 찌르고 찔려가며 정을 보탰지요. 의무와 책임감마저 다 식어버려서 두 번쯤 나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심호흡하는 법을 알게 되었지요. 너무나 익숙해진 나날이 죽을 만큼 싫어 조바심으로 매일매일을 두 발로 비벼끄고 있을 때 그들과 함께 하늘을 보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내가 보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내가 달리던 길, 그 길 말고도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게 샛길로 접어들어 물소리도 새소리도 평생 함께 듣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을 무작정 같이 좋아했습니다. 싫은 사람은 이유를 찾아서라도 같이 멀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함께라는 부사처럼 의지하며 10여 년을 지냈습니다.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서 더 열심히 일하며 살았습니다. 그땐 모든 것에다 열심이었습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인생이란 무엇인가에서 ‘분노는 나약함의 증거이지 힘의 증가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나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가까울수록 서로 더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왜 그땐 몰랐을까요.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많이 들어줘야 하는 걸 왜 몰랐을까요. 화가 나 있을 때는 내가 다 옳고 남의 말은 다 틀린 것 같지요. 서로 생각이 다를 뿐인데 사람이 틀린 것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인간도 아니라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맹세하듯 돌아서지요. 시간이 지나면 계절이 바뀌듯 마음들도 각기 다른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것을 같이 할 것 같던 마음들에 찬바람이 돌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사소한 것에 화를 내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언젠가부터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든 용서든 흐르는 것을 억지로 막아버렸습니다. 삼켜버렸습니다. 참으면 좋을 것은 마구 뱉어 버렸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고 후회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는 며칠씩 끙끙 알았습니다. 안 보면 궁금하고 안 보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생각이 차츰 줄어들면서 어쩌다 마주치면 불편해 서로 피하기까지 했습니다. 종종 걸려오던 안부 전화도 반갑지 않았습니다. 좋아했던 만큼 미움도 컸던 모양입니다. 함께한 시간만큼 상처도 깊었나 봅니다. 그렇게 혈기왕성한 사십 대를 함께한 사람들과 지난 칠팔 년을 별스럽지 않게 보냈습니다. 생각해보니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길었습니다. 

 

다 저녁때 전화를 받았습니다. 만나자는 말에 흔쾌히 대답하고 나서 놀랐습니다. 조금은 반가웠습니다. 약간 들뜬 마음으로 약속 장소를 찾아가면서 생각했습니다. 좋은 기분으로 돌아오려면 마음을 비우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이상적인 만남은 유쾌함이 헤어진 뒤에도 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고마운 게 더 많은 사람들입니다. 마른 가지에 봄물 오르듯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서 돌아오고 있습니다. 눈물도 길을 잃었나 봅니다. 주책맞게 눈물이 흐릅니다. 그동안 세월만 흐른 것이 아니라 마음도 흐르고 있었나 봅니다. 

 

계절은 길을 잃지 않고 제시간에 맞춰 잘 찾아오는데 나는 이슬 한 잔에 봄눈 녹듯 녹아 질척거리고 있습니다. 허둥거리고 있습니다. 10분이면 도착할 집을 지척에 두고 50분을 헤맸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유턴할 수 있는 시간도 기회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이 사소한 기회조차 오지 않을 때가 오겠지요. 
옛말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속의 유턴 (U-Turn)은 늘 일상의 여유 속에서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

 

김미희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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