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수필 ‘동심언어사전’

2018.03.30 09:24

KTN_WEB 조회 수:131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동심언어사전’

 

비가 옵니다. 봄비입니다. 겨울잠에 빠진 잠꾸러기들이 아직도 많은가 봅니다. 비는 계절을 알리는 메신저지요. 깊은 산속부터 넓은 들녘까지 토닥이며 생명을 깨웁니다. 이 비 그치면 온 세상은 마법에서 풀린 듯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겠지요. 어느 유명한 화가의 그림보다 사진가의 사진보다 더 그윽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특별한 세상을 빚어 놓겠지요.

 

봄비가 마당귀를 흠뻑 적시는 날에 한 권의 시집을 받았습니다. 태평양을 건너온 묵직한 시집이 마음밭을 적십니다. 노란 구름이 둥실 떠 있는 유채밭에 깨알 같은 언어의 씨앗을 뿌려놓았습니다. 한 자 한 자 모내기하듯 줄 맞춰 심은 심성이 보기 좋습니다. 올곧은 시들이 따뜻하게 숨을 쉽니다. 쉼표도 마침표도 넉넉한 게 훈훈합니다. 낱말과 낱말이 짝이 되어 부둥켜안았습니다. 하나의 언어가 다른 언어를 만나 노래가 되는 시 316편은 봄 처녀의 나물 바구니처럼 풍요롭습니다. 찔레꽃도 진달래도 냉이꽃도 피어 환합니다. 한 움큼의 두릅도 씀바귀도 있습니다. 봄 향 가득한 시집에는 한 장 한 장 펼칠 때마다 고향의 향기를 물씬 풍깁니다. 봄비 소리에 맞춰 소리 내 읽어봅니다. 가슴이 뜁니다. 벅찬 기운이 봄 들녘처럼 웅성거립니다. 시를 읽으며 이렇게 가슴 뜨거운 적이 있었던가. 고운 시심을 품고 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고 사막을 달려온 시집에 시인의 마음마저 더해졌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한글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새삼 감동을 줍니다. 참 좋습니다. 

 

태평양을 건너온 시집은 이정록 시인의 ‘동심언어사전’입니다. 시인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가슴에는 평생 길들여지지 않는’ 동심이 ‘가슴우리’ 에 가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정록 시인은 웃음이 많은 개구쟁이 시인입니다. 그의 언어는 ‘씩씩하게 붕붕거리는’ 호박벌 같습니다. 내포의 넉넉한 해풍을 맞으며 자라서인지 호방하고 유쾌하고 시골스럽습니다. 그의 시는 한없이 낮고 또 한없이 높고 깊습니다. 열 권의 시집을 통해 그가 세상에 던지는 화두는 늘 변했지만, 사람 냄새 그득한 아름다움은 한결같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시인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동심이 있어서지요. 그의 시를 읽으면 어린 시절이 숨차게 달음질쳐 옵니다.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묶여있던 마음이 주르륵 풀립니다. 마냥 착해지고 싶어집니다.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얼굴 가득 메밀꽃이 핍니다. 덩달아 키득거리며 으쓱대고 싶어집니다. 

 

어릴 때부터 꾸어 온 꿈이 내게도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나도 잊고 있었던 꿈을 지난번 한국 갔을 때 친구가 말해줘서 알게 되었습니다. 머리맡 서재에 시집이 가득한 삶을 꾸었다지요. 그러나 한세월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모국어는 내 삶의 자양분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저 밥 벌어먹으려면 알량한 영어를 익혀야 했으니까요. 모국어보다 영어가 더 필요한 곳에 뿌리내린 삶은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습니다. 서툴어도 꿈속에서조차 영어로 말해야 했고 싸울 때마저 되지도 않는 영어가 튀어나왔습니다. 차츰 모국어는 잊혀지고 그 영역에 어눌한 영어로 채워야 했습니다. 그것만이 현실을 살아내는 최선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언어는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울림이지요. 영혼을 흔들 수 있는 언어가 언어지요. 그 언어로 언어의 마음을 읽고 쓰면 되는 것이지요. 시의 여운과 울림을 감지하면 되는 것이지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지요. 시를 읽는 사람과 시를 읽지 않는 사람. 시와 함께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삶이라는 열차를 타고
먼 길 가다보면
때론 멀미가 나지.
나만 입석인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 아냐?
갈수록 짐은 무거워지고
구두 속 발가락은 이상한 짐승으로 자라지.
함께 떠나온 사람도 뿔뿔이 흩어지고
낯선 말소리에 외롭기도 하지.
굴속처럼 깜깜하기도 하지.
하지만, 이것만은 마음에 새기자.
너를 이정표로 삼고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네가 다른 지도를 찾아 두리번거린다면
차멀미가 사람멀미로 바뀐다는 것을.
사람이 싫어지고, 싫어하면
이번 여행은 끝이란 것을.
이정록, (사람멀미) 전문


 사람멀미 하며 구질구질한 이방인으로 30년 넘게 살다 보니 어느 날 시인이란 호칭이 붙었습니다. 모국어가 낯설어 사전을 뒤적이며 시를 썼습니다. 시를 머리로 쓰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시가 안개에 갇힌 듯 꿈결에 있는 듯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늦었다는 생각을 싹둑 도려’내고 ‘두려움을 설렘으로 감싸안은 사람’처럼 ‘늦었다고 생각할 시간마저 아낀 사람’처럼 몰두했습니다. 늦깎이 시인이 되어 그 힘겨운 능선을 넘어 한숨 돌리고 바라보니 봄 들녘에 겨우 닿았습니다. 
텅 빈 들녘입니다. 그 들녘에 억지 부리며 꽃은 심지 않으렵니다. 무던하게 뚜벅뚜벅 맨발로 건너고 싶습니다. 가다가 지치면 길섶에 잠시 시詩었다가 가렵니다. ‘허튼 걸음’이 아닌 ‘사람다운 바른 걸음’으로 ‘걸음걸음’을 채우며 가렵니다. ‘땅바닥에 애호박 하나씩 놓고 가는’ 호박벌이 붕붕거리는 호박넝쿨이 되고 싶습니다.  *

 

동심.jpg

 

 

김미희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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