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수필 유채꽃 일기

2018.04.13 13:07

KTN_WEB 조회 수:122

  [ 수필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유채꽃 일기

 

기이한 일입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요. 텃밭도 아닌 뒤뜰 정원 작은 나무들 사이에 터를 잡았습니다. 몇 해 전 엄마가 호박이랑 오이씨를 심어 본 적이 있었지요. 그곳은 워낙 거칠어서 아무 데나 덩쿨을 잘 뻗는 호박도 별 재미를 못 본 터라 그 뒤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은 땅이었지요. 그런데 그곳에 연한 이파리 몇 잎을 단 가냘픈 유채꽃 한 그루가 꽃을 피웠습니다. 씨를 뿌린 적도 없고 더군다나 유채꽃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느 날 우연히 생긴 일입니다. 예고도 없이 가슴에 박히는 사랑의 씨앗처럼요. 엊그제 느닷없이 퍼부은 폭우에도 끄떡없이 서 있습니다. 갑자기 기온이 30도로 내려가 걱정했는데 온몸을 흔들어 안녕하다고 말합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허리를 꼬며 작은 소리로 웃어줍니다. 나를 그 옛날 그 시절로 데려가려고 찾아왔나 봅니다.

 

30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오래도 살았습니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맞는 말인가 봅니다. 결혼기념일도 연도별로 명칭이 있다지요. 30주년을 진주혼식이라 한다며 진주목걸이와 장미꽃 30송이를 건네줍니다. 내년이면 60줄에 앉을 사람이 멋쩍게 웃는 모습은 여전합니다. 하얀 치마에 꽃물 드는 줄 모르고 노랗게 웃고 있습니다.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찍은 신혼여행 사진입니다. 너무나 오랜만에 펼쳐보는 신혼여행 사진첩. 누렇게 바래고 더께 앉아 뚝뚝 끊어지는 기억처럼, 넘길 때마다 낱장이 하나둘 떨어집니다.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버렸습니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꽃물처럼 서로에게 물들어 너도 나도 아닌 우리로 살면서 참으로 많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가슴에 박힌 씨알 하나 품어 뿌리를 내리고 움을 틔우고 기둥을 세우고 가지를 치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느라 30년을 보냈습니다. 제대로 살아낸 것 맞겠지요. 엄살 한 번 떨지 않고 살았으니 허튼 세월을 보낸 건 아니겠지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만났습니다.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결혼이란 걸 했습니다. 함께 살다 보면, 그냥 함께라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 유채꽃 만발한 사월에 부부가 되었습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미래를 약속했지요. 유채밭을 배경으로 열일곱 쌍의 신혼부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는 유채꽃처럼 노랗고 예쁜 꿈들이 유채꽃만큼 환합니다. 여행 첫날 만나 3박 4일을 함께했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인연이었길래 한날에 신부들이 되어 또 그곳에서 만나 신랑들 등에 업혀 저렇게 웃고 있을까요. 그 웃음에는 한 치의 의문이나 의혹은 없습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꽉 차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나와 다를 것이 없겠지요. 미풍에도 흔들리는 치맛자락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에 토라지고 야속해 돌아누웠겠지요. 시시때때로 내리는 여우비에도 마음마저 젖어 눈물둑이 무너질 때가 많았겠지요. 더러는 이미 남남이 되어 이날을 잊고 아니 잊으려 애쓰는 사람도 있겠지요. 나랑 똑같이 앉아 똑같은 생각으로 묵은 사진첩을 넘기며 이 밤을 뒤척이는 사람도 있겠지요. 

 

마음속 잔돌로 담을 쌓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 담이 너무 단단해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얼굴이 아닌 등을 보며 말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돌아서면 보이지 않는 담 모퉁이를 좋아했습니다. 그 모퉁이에서 울음을 삼키며 잔돌에 마음을 갈았지요. 구름 낀 날이 많아 눅눅해서 마음 속 잔돌에 이끼 끼는 날도 많았습니다. 이끼 낀 잔돌이 말문을 막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 잔돌이 먼저 날아가 마음에 찰과상을 입힐 때가 많았습니다. 잔돌은 따뜻하면 녹아버리는 것이었는데, 내가 쌓은 담 밖에서 서성거리느라 지쳐 잠든 날이 많았습니다. 

결혼서약처럼 윗실 북실 한마음 되어 
매듭부터 짓고 달려야 했던 길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살았다 
외눈에 다리 하나로 헤쳐가는 길 
허튼 한 땀도 용서치 않았다 
어디든 가는 길에 표식을 남겨야 했기에
둘이서 보폭을 맞추며 눈치껏 처신했다
한마음을 품는다는 건
때론 소풍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온 길도 있었지만 
발 디디고 싶지 않았던 길도 외면하지 못한다
팽팽하게 시력을 맞출 때도 
억지로 떼는 발걸음에도
엉킨 매듭을 풀어내고 다시 가야 했다
매듭 짓는 그 순간까지
그러니 숨소리가 그리 그악스러울밖에
-졸시, 재봉틀(동행9) 부분-

 

뜯어내고 다시 30년을 박아보라 한다면 못 할 것 같습니다. 너무 곱게 박아서 너무 튼튼하게 누벼서 뜯을 수가 없습니다. 더러는 삐뚤어진 곳도 있겠지요. 색이 안 맞아 눈에 거슬리는 곳도 있습니다. 촘촘하게 박아서 우는 곳도 있을 겁니다. 너무 허술해서 머지않아 풀려버릴 곳도 있겠지요. 바늘에 찔려 핏물로 얼룩진 곳도 있습니다. 보기 싫으면 보기 싫은 대로 예쁘면 예쁜 대로 그냥 놔두고 가렵니다. 너무 신중하지도 그렇다고 경솔하지는 않게 가렵니다. 둥글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모가 났으면 모가 난대로 살면 되지요. 그저 생긴 대로 살렵니다. 이제는 좀 느슨하게 조시를 맞추고 가렵니다. 달리지도 말고 지치면 쉬면서 가렵니다. 

 

돌아보니 좋은 일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건강하게 큰일 없이 여기까지 달려온 것만으로도 족하지요. 숨차게 달려온 길모퉁이마다 각각 다른 모양의 꽃이 피어 있겠지요. 다른 향의 그리움을 담고 있겠지요.  *

 

김미희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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