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수필 선물이 되는 시간

2018.09.28 09:45

ohmily 조회 수: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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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선물이 되는 시간

 

비가 내립니다. 며칠째 호우주의보를 동반하고 내리는 비는 오늘도 확실하게 방점을 찍으려나 봅니다. 가을비는 그리움입니다. 가을비는 마음을 다독이는 비입니다. 느낌표이고 쉼표이고 때론 여운을 품은 말줄임표입니다. 

다 늦은 저녁에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어라! 내 마음을 어찌 알았대~ ” 반가웠습니다. 비도 오는데 오랜만에 맥주 한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오래된 남사친이 제일 편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다른 친구(여사친)와의 저녁 약속이 호우주의보로 인해 무산되어 조금은 섭섭해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빗속을 뚫고 달려갔습니다. 불타는 금요일이고 저녁 시간이라 홀 안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문 앞에는 테이블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미리 와 포치(porch)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여기 좋지?”라고 묻는 친구의 말을 더 들을 필요도 없이 “응, 딱이야!” 호우주의보고 뭐고 간에 이 빗소리를 어떤 음악에 비하겠습니까. 우비를 입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대리 주차 요원의 움직임은 영화 속 한 장면이고 빗속에 시선을 고정시킨 우리의 모습은 한 폭의 정물화입니다. 그림자도 벗어놓고 앉아 가로등 불빛을 받고 사선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노라니 꼭 여행자가 된 것 같습니다. 다들 말이 없습니다. 낯설지만 매일 있었던 듯한 따뜻한 이 풍경 앞에 시시껄렁한 얘기는 해서 또 뭐하겠습니까. 차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가로등 밑을 지나가는 우산들, 그 위로 폴짝폴짝 맨발로 뛰어다니는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까뜨린느 드뇌브 주연의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오프닝 씬이 떠오릅니다. 한 번씩 훑고 지나가는 싸늘한 바람 또한 우울했던 마음속까지 쓸고 가 오히려 후련하기까지 합니다. 앞으로 이런 순간이 몇 번이나 더 찾아올까요. 

막 털어놓은 친구의 영화 같은 연애담 때문인지 아니 왜 이 순간에 있지도 않은 떠나간 첫사랑이 떠오를까요. ‘쉘부르의 우산’ 영화 속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 생각나 그러겠지요. 세상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겠다는 언약 때문이겠지요.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그 음악은 또 어떻고요. 소리가 보이는 듯합니다. 비 오는 날이면 올케언니의 바바리코트를 빌려 입고 어른 흉내를 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교복을 벗기 전이라 친구와 함께 음악다방 제일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마치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라도 하듯 음악에 빠져 사랑의 가슴앓이를 하던 때가 있었지요. 

불뚝불뚝하고 싶은 말이 올라왔지만, 오늘은 그냥 듣기로 했습니다. 좋은 이야기만 하기로 한 약속도 있지만, 왠지 그러고 싶은 저녁입니다. 아마 너무 편하다 보니 별것도 아닌 일에 흥분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빗소리에 묻혀 들리는 모든 이야기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정겹습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편한 사람이 제일 좋다는 한 친구의 말에 모두 동감했습니다. 신경 쓰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만나야 하는 관계는 이제 별로라고요. 이제 막 다시 사랑을 시작한, 그것도 이 나이에 이십 대의 사랑을 꿈꾸는 친구 역시 그 말에는 같은 생각이랍니다. 

이 폭우가 그치면 가을이 문턱을 넘겠지요. 우리들도 여름을 막 지난 가을입니다. 여름은 이 폭우만큼이나 강렬했습니다. 슬슬 단풍이 들듯 머리는 벌써 희끗희끗해졌습니다. 하지만 내면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싹이 있겠지요. 그 싹이 무엇이든 이 가을빛에 잎을 밀어 올려 슬쩍 터를 넓히는 것은 어떨가 생각해 봅니다. 나무들이 옷을 갈아입는 건 가을빛에 매료되어서지요. 뜨거운 여름에는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영혼 없는 사람처럼 뛰었습니다. 이젠 영혼이 잘 따라 오고 있는지 뒤도 돌아보며 숨도 고르고 걸음도 재어가면 좋겠습니다. 아직 못다 한 사랑이 꿈이 있으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목탄으로 밑그림이라도 그려보면 좋겠지요.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털어놓기 위해서 위로받기 위해서 추억하기 위해서지요.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중의 제일 아름다운 건 거짓 없는 정직한 목소리와 겸손한 자세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평온한 사람의 얼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그리운 날에는
사선으로 바람에 몸을 기댈 일이다

 

직립뿐인 삶에는
두근거리기만 하는 붉은 세월
그 두께만 더해졌다

 

곧 당신을 향해 떠나고 있다는 발신음조차
수평에 붙매어 알릴 수 없어
어쩌다 당신을 만나도
당신이 아닌 당신으로 돌아가는 중인
다만 당신 같은 당신일 뿐이니

 

수평이나 수직의 길 바깥
어느 언저리에 이는 바람에라도
비스듬히 기대어
묵은 그리움 모두 비워낼 일이다

 

그렇게 몸을 기울여 비우는 일은
채우는 일도 된다 싶어
그리운 날에는 차라리
사선으로 바람에 몸을 맡길 일이다

 

김미희, (사선 긋기) 전문

 

김미희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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