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수필 오만과 편견

2018.10.12 09:25

ohmily 조회 수: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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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오만과 편견

 

“엄마, 코피. 코피나!”
“뭐, 코피?” 큰아이가 내미는 냅킨으로 닦고 보니 확실한 코피였습니다. 아무리 꾀병을 부려보고 싶어도 너무 튼튼해서 가당치도 않았습니다. 며칠을 굶어도 쓰러지기는커녕 코피 한번 흐르지 않았으니까요. 한창 젊었을 때는 부부싸움이라도 하면 나를 좀 봐달라고 좁은 옷장에 이불을 펴고 몇 날을 보내도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구요? 아무리 아픈 척을 해도 며칠을 굶어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혈색이 너무 좋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코피를 자주 봅니다. 나를 너무 많이 부려먹었나 봅니다. 평생 써먹어도 끄떡없으리라 믿었나 봅니다. 조금 무리했다 싶은 다음 날은 어이없게도 으레 입술이 부르트고 코피를 쏟고 맙니다. 삼겹살을 굽다 말고, 코피라니. 오늘도 할머니표 삼겹살을 주장하는 남편과 불판에 구워야 제대로라는 큰아이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실랑이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날도 딱 이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난생처음이었습니다. 내 생전에 코피를 다 보다니. “앗싸!” 이때다 싶었습니다. 단숨에 큰아이 방으로 올라갔지요. “너 울 엄마 아프게 하지 마!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너 안 볼 거야. 네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소용없어. 내 엄마 아프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속상한데 코피까지나니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더 서럽게 코를 흥흥 풀어대고 눈물까지 훔쳐 가며 이 상황을 확실히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흐느끼기까지 했습니다. “엄마, 그게 아니잖아. 나도 할머니 사랑해. 근데, 할머니가 내 말을 무시했잖아.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그게 어떤 삼겹살인지 알아? 덴마크에서 우리 회사에 특별히 보내온 거야. 내가 할머니 해드리려고 가져온 거라고. 엄마 아빠 오는 시간 맞춰 요리하려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할머니가 망쳐놨잖아!.” “그래도 너 그러면 나빠. 다시는 그러지 마. 그저 삼겹살은 삼겹살일 뿐이야. 그까짓 것 때문에 왜 할머니가 속상해해야 하는데?”

 이제 엄마는 우리 곁에 없고 이 일은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하필 그날은 일이 늦게 끝났지요. 늦게까지 일하고 집에 오니 집 안에 냉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얘긴 즉, 큰아이가 회사에서 특별한 삼겹살을 가지고 왔답니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집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요리하려고 할머니께 “제가 할게요. 엄마 아빠 오면요.”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고 엄마는 내가 집에 올 시간이 다 되어도 요리를 하지 않는 손주 녀석을 기다릴 수 없어 “삼겹살쯤이야, 내 전문이지” 하시고는 할머니표 삼겹살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었지요. 뒤늦게 알아차린 아들 녀석은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저녁 먹기를 거부하는 거로 화풀이를 하고 말았지요. 결국에 큰 아이는 처음으로 저녁을 걸렀고 속상한 엄마는 “내가 너무 오래 있었구나!” 하시며 수저를 놓고 방으로 들어가셨지요. “그냥 조용히 가자.”고 조르는 남편의 말에 사태는 억지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기막힌 상황이었습니다. 다 어그러지고 말았지만, 삼겹살쯤이야 하시며 손주가 아까워서 시키고 싶지 않았던 할머니 마음에, 오랜만에 오신 할머니를 위해 특별한 요리를 해드리려 헸던 요리사인 손주의 마음. 안쓰러운 그 마음이 생각나 코피가 나는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고 흥얼거리며 펄펄 끓는 생강 물에 삼겹살을 넣고 뒤적입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지막지한 엄마였고 아내입니다. 나는 특별히 잘해드리는 것도 없으면서 무조건 엄마 편이었으니까요. 그 누구도 내 엄마를 아프게도 화나게도 할 수 없었지요. 두 오빠가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며느리 눈치 보며 사시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남편이 미국에 들어온 첫날 “나는 내 엄마랑 같이 살아야 하니까 만약 그게 싫으면 이혼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참으로 무섭게 오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엄마는 내가 감당해야 하는 나의 몫이라 생각했습니다. 막내인 내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엄마는 알고 계셨을까요. 따지고 보면 우리 엄마는 쉬운 분이 아니셨지요. 물론 사랑이 넘쳐서였다지만, 매사 당신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으니까요. 그냥 다 맡기고 사는 게 오히려 편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느라 남편과 애들이 힘들고 불편할 때가 많았을 텐데 흔한 내색도 투덜대는 소리도 한번 없었습니다. 

 두 주째 내리는 가을비는 지치지도 않나 봅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쉬지 않고 내립니다. 오랜만에 뒤란에 상을 차렸습니다. 이런 날에는 잘 삭힌 홍어에 막걸리가 제격인데 아쉬운 대로 삼겹살에 소주를 하기로 했습니다. 우산을 쓰고 나가 따온 깻잎에 수육처럼 삶아낸 할머니표 삼겹살을 싸서 입안 가득 넣고 오물거리니 눈물이 핑 돕니다. 엄마가 그립고 내 식구들이 고마워서 눈물 납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산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내 멋대로 살아도 눈 감아 주고 다 받아주고 이해해 주는 내 식구들, 내 편. 그러는 게 당연하다는 듯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는 나, 나는 아직도 오만과 편견 사이의 “과”에 머물러 있나 봅니다.

 

좀 이른 오후 토요일
잘 익은 얼굴들이 단골집에 앉았다
보기만 해도 속 훤히 트이는
이민 삼십 년에 짠맛 매운맛 다 삭힌 묵은둥이 셋
두툼한 가마솥에 된장 풀어 삶아낸 수육처럼
기름칠 없이도 고소한 입담에
잔가시까지 숙성된 연분홍빛 속내
묵은지에 싸서 입안 가득 채우고 
시큼털털한 밀주 한 잔 비우고 나면
뻥 뚫린 콧속은 묘하고도 신비한 우주가 틀림없다

 

서슬 퍼런 가슴
신문지에 둘둘 말아 삭혀낸 이 맛 모르면
제대로 된 인생을 모른다며
주거니 받거니 달달해진 취기는
어느새 귓불까지 삭혀내
연분홍 속살 냄새를 살랑이는데
꼭 저절로 찾아온 복사꽃만 같아
또 한 번 화~ 해지는 잘 익은 얼굴
눈가의 주름 추렁거리며 한바탕 웃고 나면 
만개했던 시름이 복사꽃처럼 사르르 떨어진다

 

김미희, (홍어 삼합三合) 전문
 

김미희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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