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수필 숲속의 벤치

2018.11.30 09:03

ohmily 조회 수: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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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숲속의 벤치

 

언제부턴가 숲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숲, 숲, 숲하고 말하면 입술 사이로 비밀스러운 생각이 아무도 모르게 새어나가는 것 같아 좋습니다. 조금은 외경스럽기까지 해 더 마음에 듭니다. 울적하거나 일이 꼬일 때도 주문처럼 “숲숲숲”하고 열 번을 되뇝니다. 그럴 때면 테스의 입술에 닿았던 매혹적이고 탐스러운 딸기, 그 은밀스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는 거 같아 가끔 얼굴에 단풍이 들 때도 있습니다. “숲숲숲!”은 마법의 주문처럼 내 곤한 삶을 위로하는 주술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자주 가는 숲속, 단풍나무 아래 내 전용 벤치가 있습니다. 도심 속의 숲인데 원시림처럼 우거지고 깊습니다. 도시의 삶에 지친 사람들을 말없이 다 안아줄 만큼 품이 넓은 숲이지요. 그 숲에도 아름답게 불이 붙었습니다. 숲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작은 시냇가까지 붉게 노랗게 불길이 번졌습니다. 천지가 온통 총천연색으로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면 숲은 사금파리 울음소리를 냅니다. 눈을 감으면 자연이 주는 교향곡이 들리고, 눈을 뜨면 온통 자연이 선사하는 황홀한 시간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숲속의 빈터를 지키는 내 전용 벤치에 앉았습니다. 부엌을 비우고 공원에라도 가 있으라는 두 아들의 명령에 벤치에 앉아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늘 비어있는 이 벤치는 한 뼘 언덕에도 지쳐 헐떡이는 나를 위해 마련된 자리인 게 분명합니다. 단풍잎을 곱게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을 흠뻑 바른 이파리들이 기분 좋게 팔랑거립니다. 손바닥만 한 노트에 내밀한 바람의 소리를 받아 적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잘 영근 씨앗이라도 시 밭에 심은 양, 미리 새싹을 그려보며 설레기도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정록 시인의 ‘의자’를 읽었고 함민복 시인의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을 읽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시를 마주해도 이곳에서는 위로를 받곤 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멀리하지만, 자연은 양팔 벌려 언제나 우리를 맞아 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숲에 들어서도 바쁘지요. 헉헉 숨을 뱉어내며 달려갑니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 맑은 가을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예쁜 낙엽을 깔아 놓고 기다리는 벤치를 그냥 지나쳐 갑니다.

  

 달라스 자연의 조화는 추수 잠사절을 기점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들녘은 온통 형용할 수 없는 색으로 덮입니다. 그 어떤 예술가도 흉내 낼 수 없는 조화를 보여줍니다. 자연은 제때 제 모습으로 옵니다. 초봄에는 초자연적인 신비로, 한여름에는 광적인 열정으로 가을엔 불이 되어 온몸을 태우며 오고 겨울에는 비움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줍니다. 자연의 시간은 정확합니다. 그 어떤 기계도 가늠할 수 없는 정확한 순환의 순리를 따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대지의 순환입니다. 순리는 순리대로 두어야 합니다. 숲속의 작은 벤치에는 흙이 있고 바람이 있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음률과 색이 있습니다. 비록 지나쳐가지만, 사람들의 발소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시를 읽고 음악을 듣고 나를 스치는 사람들의 표정을 봅니다. 고추잠자리가 되어 가지 끝에도 앉아 보고 갈 새가 되어 구름 위에도 앉아봅니다. 

 

추수감사절 저녁상을 차립니다. 평생을 차려준 음식으로 살아온 나. 복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엄마가 해주시는 음식으로. 아이들이 다 큰 이제는 아이들이 차려준 상을 받아 가끔 죄책감도 쌈 싸서 먹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두 아이가 그것도 두 사내아이가 부엌에서 도란거리는데 어미라는 나는 할 게 없어 서성대면서 하루를 다 써먹고 저녁이 되어서야 어둑해질 때를 기다렸다는 듯 어디에 상을 차릴까 고심을 합니다. 늘 비어 있는 다이닝 테이블에 상을 차리기로 합니다. 단풍잎을 찾아서 길 건넛집 앞을 서성거리며 예쁜 잎들로 골라왔습니다. 여러 모양의 가을은 테이블 위에서 가을 냄새를 제대로 풍기며 예쁜 장식이 되어줍니다. 두고온 숲 속의 벤치가 생각나 더 정겹습니다. 깊이 넣어 두었던 그릇을 꺼내고 숟가락 젓가락 옆에 오늘은 포크와 나이프의 자리도 마련했습니다. 

 

 어디에 앉을까. 그늘지고 편한 자리만 고집했던 나. 나에게도, 내 숲에도 빈자리 하나쯤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가장 고요하고 가장 고독한 사랑을 위한 자리. 

 

봄 가고
여름이 지나도 그저
지나가시는 당신

 

이제쯤이면 
돌아봐 주시겠거니
서성이고 또 서성여도
그냥 지나만 가시는 당신

 

차라리
발갛게 불이라도 지펴
환하게 들키고 싶네
이 속내를


졸시, (단풍) 전문

 

김미희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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