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박혜자 수필 김장 김치 이야기

2018.12.07 13:07

KTN_WEB 조회 수:24

  박혜자의 세상 엿보기’(peek through the wind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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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김치 이야기

조석으로 찬바람이 부니 옛날이 그립다. 예전에 한국 살 때는 이맘때쯤이 되면, 집집마다 김장준비를 하느라 바쁘고, 골목마다 길고 긴 겨울밤을 따뜻하게 해줄 연탄들이 몇 백장씩 트럭에 실려 배달이 되곤 했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어머니는 날씨가 아무리 궂어도 백포기 김장쯤은 눈깜짝 할 새에 하시곤 했는데, 갈치속젓이나 조기젓이 들어간 엄마표 김치는 언제 먹어도 맛이 있었다. 하얀 쌀밥위에 짙은 젓갈향이 나는 전라도 김치를 쭉쭉 찢어 먹으면 잃었던 입맛이 금방 돌아오고 동지섣달 추위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김장 때는 워낙 양이 많아 마른 고춧가루를 쓰셨지만 보통 때 엄마 김치는 늘 생고추 간 것이 들어가서 빛깔도 좋고 감칠맛이 더했다. 요즘이야 친정엄마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유튜브나 각종 미디어에 김치선생들이 넘쳐나서 배우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딸들은 주로 엄마음식 간을 보면서 어깨너머로 음식 만드는 것을 배웠던 것 같다. 특히 한국음식은 ‘손맛’ 이라 하여 만드는 이의 개성과 음식철학이 함께 들어가 있기 마련이라, 같은 음식이라도 만든 사람에 따라 맛이 다 제각각이다.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 교류를 한 이웃이나 지인들의 음식은 맛만 봐도 누가 만든 것인지 금방 알 수가 있다.

 

갓 김치 하면 여수 돌산 갓김치를 최고로 치는데, 나의 기억 속 최고의 갓김치는 강진에 사셨던 큰어머니가 만든 갓김치이다. 큰어머니는 김장 때 갓과 큼직하게 썬 무를 같이 버무려 갓김치를 담았는데, 김치가 익으면 갓도 맛있지만 갓의 보라색물이 들어간 무가 덜큰 한 것이 더 맛이 있었다. 그리곤 동그란 밥상에서 그 보라색 무김치에 젓가락을 꽂아 어린 조카들에게 내밀곤 하셨는데, 지금은 그 김치를 다시는 맛 볼수가 없다. 이상하게도 오감 중 맛의 기억이 가장 오래 남는 것인지 난 지금도 추억의 음식을 기억하노라면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과 풍경이 그대로 떠오른다. 미국으로 이민 온 뒤 두 어번 강진을 더 갔었는데, 큰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던 음식을 용케 기억해 내시곤 한 상을 차려주셨다. 갯벌에서 금방 채취한 즙이 많은 꼬막을 삶고, 굴비나 서대찜, 어리굴젓, 각종 산나물과 최소한 서너 가지 이상의 김치로 이루어진 남도 밥상 말이다. 봄에 가면 여린 청보리 잎으로 된장국을 끓이고 초여름엔 죽순으로 만든 반찬이 꼭 한 가지 이상은 나오곤 했다. 특히 가마솥에서 누른 누룽지는 가끔 후라이팬에 남는 밥을 눌러서 만든 여기 누룽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소하고 바삭해서 그만한 간식거리가 없었다. 찬바람불고 괜히 마음이 스산할 때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훌훌 마시면 저 깊은 곳에 있는 찬 것들이 다 녹아들고 마치 구들장 위에 앉아있는 것처럼 훈훈해진다. 이러한 음식들 뒤에는 세월이 변한 뒤에도 쪽진 머리를 하고 버선을 신으셨던, 오래된 고택 같았던 큰어머니가 계셨다.

 

다행히 이민 와서도 주변에 음식 나누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음식 고픈 줄은 모르고 살았다. 재료가 다르니 한국에서 먹던 것과 똑 같지는 않았지만, 솜씨 좋은 분들은 어디나 있어서 고향의 맛을 잊지 않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한식 레시피를 보면 외려 여기서 교포들이 해먹는 한국음식 보다 더 퓨전적인 것이 많고, 각종 조미료나 감미료를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오리지널 한식 맛이 아쉽기도 하다. 작년에 한국을 다녀오면서 사온 젓갈류는 너무 단짠(달고 짜고)이었고, 요리프로에 나오는 레시피들은 하나 같이 엄청난 양의 설탕이 들어가서 놀랐다. 예전 어머니 들은 국간장 하나 만으로 모든 음식의 간을 맞추었는데 생각해보면, 이런 간단한 조리법이야말로 재료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신의 한수’가 아닌가 싶다.

 

주부들의 가장 일반적이고 주부다운 걱정, 오늘 저녁은 뭘 해먹을까? 지난주에 산 마른 취나물과 고구마순으로 나물을 해먹을까 하다 손이 너무 많이 가는 것 같아 다음에 하기로 한다. 마침 무가 냉장고에 있으니, 소고기 무국과 오이무침과 고등어구이면 될 것 같다. 한 달 전부터 하리라 마음먹고 있던 김장이 자꾸 뒤로 미뤄진다. 배추가 안 좋아서, 배추 값이 비싸서, 날씨가 추워서, 등등 시절이 좋으니 엄살만 는다. 물론 식구가 없다는 것이 제일 좋은 구실인데 그래도 김치찌개나 김치찜등 마음 놓고 김치요리를 해먹으려면 한 두 박스 사다 김장은 해야 할 것 같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올 생김치 좋아하는 큰아이도 먹이고, 좀 익혀서 익은 김치 좋아하는 작은아이가 좀 가져갈 수 있도록'''. 이즈음이야 김치가 아니라도 먹을 것이 넘쳐나지만, 그래도 한국사람은 밥심 아니 김치심으로 사는 것이니, 김치가 많으면 왠지 든든하고 반찬 걱정이 덜 된다. 이왕 담그는 김에 파김치, 갓김치도 곁들여 담고 동치미 무도 사다 시원한 동치미도 담고 싶다. 생각만으로도 김치 몇 독을 김치냉장고에 묻고 있다. 

 

먹을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김치만큼 사람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장수 식품은 없다. 아마도 한민족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김치는 영원할 것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 문화유산이기도 한 김장문화는 우리 한민족이 지니고 있는 모든 식문화의 특성과 삶의 지혜를 모은 결정체임에 틀림이 없다. *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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