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수필 사람 속을 걷는 말

2018.12.1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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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사람 속을 걷는 말

잔디가 겨울잠 자는 틈을 타 땅을 팝니다. 뿌리를 뽑아내기로 했습니다. 이제나저제나 시작하려나 기다리다가 오늘 해를 넘기면 도저히 나를 용서할 수가 없을 거 같아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응, 겨울이 오기 전에 꼭 예쁘게 심어줄게!” 말을 꺼내놓은 지는 두어 달이 되었고 땅에 곡괭이가 박힌 지는 한 달이 되었습니다. 두 주 전부터 다섯 포대의 흙이 화단 옆에 쟁여있습니다. 뒤란에 있는 반 평 남짓한 화단에 팬지꽃을 심어달라고 콧소리를 섞어 부탁 같은 명령을 내렸었지요. 가을이 막 익어가는 어느 오후였습니다. “어깨만 괜찮으면 당신한테 부탁하지도 않아!”라며 교만을 살짝 찍어 말꼬리에 바른 것이 탈이었나 봅니다.

 

기어코 농부의 딸, 나의 진면모를 보여주리다 마음을 먹었습니다. 모자를 쓰고 목장갑을 끼고 중무장을 하니 황야의 무법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바람 빠진 휘파람이지만 그 소리가 뒷문에 채 잘리기도 전에 우리집 세 남자가 뒤따라 달려 나왔습니다. 네 식구가 들어서면 꽉 차는 손바닥만 한 화단에 온 식구가 달려들어 밭을 뒤집기 시작했습니다. 수영장 옆에 붙어 있는 화단이라 사방이 콘크리트로 막혀있는데 어디에서 뻗어온 뿌리인지 파도 파도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삽으로 떠서 뒤집어 보니 원추리 꽃 뿌리가 잔디 뿌리에 묶여 있었습니다. 이러니 꽃을 제대로 피울 수가 없었겠지요. 원추리 꽃은 칸나 수국 접시꽃 개나리 등을 비롯해 시절마다 꽃을 피우던 고향 집 화단이 그리웠던지 몇 해 전 엄마가 오빠 집에서 몇 뿌리 캐다 심어준 것이지요. 생각해 보니 올해는 꽃을 보지 못했습니다. 몇 뿌리가 넓게 퍼져 제법 보기 좋게 피곤했는데 엄마 가시고는 손길이 끊어져 아예 기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잔디 뿌리가 사지를 묶고 야금야금 터를 넓히고 있었으니 제때 꽃을 보여줄 수가 없었겠지요. 잔디 뿌리에 목이 조이면서도 죽을 수는 없었나 봅니다. 몇 번을 거듭해서 땅을 뒤집고 털어 실 터럭 같은, 잔디 뿌리로 보이는 것들을 열심히 골라냈습니다.

 

 내겐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모를 오래된 기억이 하나 있지요. 다운타운의 모습입니다. 루돌프가 끄는 썰매 대신 산타가 마차를 끌고 있었습니다. 마부가 산타 복장이었으니 아마 크리스마스 때였나 봅니다. 산타가 끄는 마차에 사람들이 선물처럼 앉아 다운타운을 구경하는 것이었지요. 추운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리 행복하게 했는지 모포를 덮고 마차에 앉은 사람들이나 구경꾼들 모두 손을 흔들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산타가 끄는 마차는 사람들 속을 사람처럼 걷고 있었지요. 캐럴이 울려 퍼지니 말발굽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나가는 마차를 구경꾼이 되어 바라보며 생각했었지요. 루돌프가 끄는 썰매가 아니면 어떤가. 사람들 속을 걷는 말言이 산타가 끄는 말馬이었으면 좋겠다고요. 말발굽 소리 대신 캐럴을 울리며 사람을 싣고 오는 말言이었으면 좋겠다고요. 마음속을 걷는 말言이 모두 선물 같은 말言이면 좋겠다고요.

 

 25년 동안 한결같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들고 오는 손님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의 한 분은 지난해부터 소식이 끊겼지요. 하늘나라로 주소를 옮겼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수제쿠키 선물 하나가 줄었습니다. 이젠 거동이 불편해 손수 만든 쿠키 대신 예쁜 카드 속에 스타벅스 선물용 카드를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카드 속의 따뜻한 말, 감사하다는 그 말이 한 해 한 해를 견디게 했을 겁니다. 남을 위한 말이 곧 자신을 위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 행복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많아 괜찮은 세상. 마음에서부터 본거지를 바꾼 사람들, 잔디 뿌리처럼 지독한 말 뿌리를 심어놓고 등을 돌린 사람들. 그래서 마음속에서 자라는 어여쁘고 순한 원추리 꽃을 뭉그러트려 잎도 열지 못하게 했던 말들. 그 뿌리를 억지로 뽑아내느라 기진했던 웃지 못한 날이 많았던 사람들이 따뜻한 말을 나누며 거짓말처럼 환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닳아 없어질 줄 알고 비단 보자기에 꽁꽁 싸둔 말들을 풀면 기념우표 속 얼굴처럼 웃을 수 있을까요. 단수로 태어나서 복수가 되는 말들 속에서 해로한다는 건 결국 이해와 오해 속을 잘 걸어가는 것이겠지요. 선한 말의 눈으로 마음속을 잘 걸어가는 것 말이에요.

 

사다 놓은 흙을 붓고 섞었습니다. 골라놓은 원추리 꽃 뿌리를 한 줄로 다시 심었습니다. 지독한 잔디 뿌리를 털어 내고 다시 심었으니 시절이 오면 꽃이 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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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타운은

각가지 음표들을 휘두르는 래퍼들의

, , 말들

입술, 입술들

저들끼리 부딪치며 소란을 떨고 있었다

 

누군가의 후생이고

누군가의 전생인

죽음과 함께 태어나는 한마디는 복수가 되어

분사되는 대로 명멸하고

 

시원이자 종말이 되는 복잡한 문법에서

수식을 털어낸 표정만 어정쩡

해독 불허의 불립문자로

도심을 썰매처럼 미끄러지고

 

거기

루돌프는 없었다

 

모포에 싸인 선물들은

자신의 무게로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내고

말소리에 몸을 기우뚱거릴

산타는 눈을 감은

전혀 말이 없었다

 

졸시,  (산타는 말없이 도심을 지나고 있었다) 전문

 

 

김미희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