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박혜자 수필 상의 계절

2018.12.21 09:07

ohmily 조회 수: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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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자의 세상 엿보기’(peek through the window) 

 

상의 계절
 

상(賞)이 흔한 세상이다. 특히 연말연시, 시상식의 계절이 되면 분야별로 하도 상이 많아 그 많은 상의 이름을 다 기억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어린시절에 받은 개근상 같은 상은 정직한 상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한 번도 결석 안했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한 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상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그 결과물 때문이다. 영화배우는 출연작에서 얼마나 열연했는지를 화면으로 증명하고, 하다못해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주는 상도 각 분야의 고수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남들보다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받을 때 주어진다. 그런데 최근에 주목하게 된 상 중 문학상 부분에선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같은 상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게 된다. 모든게 인플레 현상이다. 우스개 소리로 서울에서 김시인! 하면 세명 중 한명은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시인이 많은 세상은 확실히 좋은 세상이다. 아니 좋은 세상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파편들을 모아 상상과 사유의 힘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 많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탁월한 시인 혹은 문인 에게나 주어야 할 상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면 이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문인이라면 안다. 어떤 분야에서 누가 상을 받았다는 것이 무조건 박수 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일인 출판사가 늘어나면서 출판사의 재정을 위하여, 존립을 위하여 마구 상을 제정하고 협찬도 받고 상도 준다. 이중에서 해외에 있는 문인들은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럴 듯한 프로필은 필요하고 외국에서 유명한 시인 혹은 문인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누이좋고 매부 좋은 식의 조건상들이 출현한다. 그런 상일수록 이름들은 더 거창해서 한국을 넘어 국제 나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이름들이 꼭 들어간다. 교포들은 상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박수치고 환영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한국의 문단장사가 이미 해외에도 침투했다는 사실이다. 지방의 알지도 못하는 문예지에서 등단을 시켜주고 의무적으로 문예지를 구입하게 한다. 당사자에게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형편이 어려운 문예지에 도움 좀 준 게 뭐 잘못됐나요?”

 

이럴 때 난 가끔 <닥터 지바고>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나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 등 그 거창한 노벨상을 거부한 문인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은 왜 그 위대한 상을 거부했을까? 상받으면 우쭐해지고 주변에서 칭송하는 것을 그들은 몰랐을까? 그들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난 그들이 그러했기 때문에 문학사에 길이 남은 문인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PR의 시대, 없는 프로필 까지도 꽉꽉 채워 안 닫히는 지하철 문처럼 그중의 한 두명은 밖으로 뛰쳐 나와야할 만큼 프로필을 쟁이는 시대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구요”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남이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명함이라도 프로필이라도 빈틈없이 꽉꽉 채워 나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 프로필이라는 것엔 별로 관심이 없다. 화가라면 그의 그림이 프로필이요, 문인이라면 그의 글이 프로필이다.

 

큰아이는 초등학교부터 하이스쿨까지 모범 시민상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타왔다. 남편은 당연히 칭찬을 해주었지만 난 왠지 그 상을 보면 숨이 막혔다. 우리아이가 죽을 때 까지 법규를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시에서 제정 하는 대로, 주에서 시키는 대로, 연방법이 명시하는 대로 살다가 죽으라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나는 칭찬대신 이런 상은 안 받아도 된다는 농담을 많이 했다. 어떻게 사람이 살면서 실수도 하지 않고 모범적으로만 살수 있단 말인가? 인간적인 것, 실수도 하고, 남에게 폐도 끼치고, 덤벙대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외출을 할 때, 난 집안의 불이란 불은 모조리 점검하고 끄는 것보다, 한 두 개 불 정도는 토마스 킨케이드의 오두막처럼 켜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보다는 알아두면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둔 인간들이 많은 세상이 기실은 더 살맛난다.

 

 작년 가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이제 막 등단한 서예인이 써준 글이 있다.


‘본질적인 것은 영원하다’ 


난 이글을 볼 때 마다, 본질적인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나의 본질, 너의 본질은 확연히 다르다. 세상에 수십억 인구가 살지만 같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들조차도 성향이 다르다. 엄마 태안에 있을 때 이미 형성된 본질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어울려 사는 인간세상에서 본질적인 것은 영원하다. 아무리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가짜 인간들이 득세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안다. 누가 진짜이고 어떤 것이 진짜인지를,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분하고 구차하고 오랜 시간 고독스럽다. 또한 자신과 정면으로 싸워야하고 현실의 벽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래야 본질적인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는 세상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던져진 존재이므로, 외로운 것이 당연하고 타인은 지옥처럼 어려워야 한다. 상 타는 것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賞도 賞 나름이다. *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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