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꽁트 성탄절에 만난 천사

2018.12.21 10:11

ohmily 조회 수: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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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릴레이 ] 한인 작가 꽁트 릴레이 30

 

성탄절에 만난 천사

 

크리스마스 이브. 오클라호마에 눈이 내렸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찾아 온 귀인같은 하얀 눈은 제법 기세좋게 내리더니 어느새 잔디밭을 순백으로 덮고 있었다. 주말이라 집에 있던 준은 아내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옆에서 거들다 눈이 내리자 서툰 부엌일을 멈추고 거실 창가로 걸어가 눈이 내리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첫눈이 내리면 왠지 모르게 설레곤 했던 기억이 세월을 거슬러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준은 아내와 한창 열애 중일 때 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 우리는 첫눈이 내리면 무엇을 했지?’ 준이 아무리 추억을 되짚어 봐도 다른 기억들과 실타레 처럼 얽혀 이거다 할 만한 기억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준은 아내의 생일이 언뜻 기억나지 않을 때마다 느꼈던 당혹감을 불시에 느껴 혼자 씁스레했다.


 그때, 우편배달차가 눈길을 헤치고 오더니 우체통에 한 뭉치의 우편물을 집어넣고 사라져 갔다. 순간 준은 반가운 소식이라도 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번번이 빗나가 늘어나는 쓰레기에 짜증만 나곤 했으나 이번만은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첫눈까지 내리질 않은가. 준은 현관문을 열면서 옷차림이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러나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닌데 다시 집에 들어가는 게 귀찮아 단념했다. 현관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밀려들어 오는 찬바람에 준은 목덜미가 써늘해져 옴을 느꼈다.


 우체통으로 걸어가면서 옷이라도 하나 더 걸치고 나올 걸 그랬나 후회했지만 이미 우체통 앞에 발걸음이 멈춰 섰다. 우체통 뚜껑을 열자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애완동물처럼 우편물들이 고개를 쳐 들었다. 준이 손을 뻗어 꾸러미를 밖으로 꺼낼 때 편지 한 통이 이목을 끌려는 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준은 무슨 편지일까 궁금해 하며 허리를 굽혀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뒷 목덜미 쪽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지며 현기증이 일었다. 뭔가 감이 좋지 않았다.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준은  집어 든 편지의 발신자를 보았다. 김주영. 순간 준은 두 눈을 의심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김주영이라니? 삼십년 전에 헤어진 이름인데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면도날에 베인 것처럼 아파오는 이름이었다. 준은 다른 우편물은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았다. 주영이가 보낸 편지를 뜯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ㅡ보고 싶은 준. 주영이예요. 당신이 사랑했고, 당신을 의지했던 주영이요. 이제 저는 모든 희망을 잃고 서서히 죽어 가고 있어요. 이 편지가 당신 손에 있을 무렵엔 아마 전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이 편지는 제 동생에게 맡겨 두겠어요. 혹시라도 당신의 연락처를 동생이 알게 된다면 당신에게 보내 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지금도 저는 당신과 왜 헤어 져야만 했는지 알지 못하겠어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운명의 그 날이 있기 전 까지 우리는 정말 사랑했잖아요. 마침내 결혼 약속까지 하고요. 그 때 저는 하루하루가 꿈처럼 행복했어요. 준, 당신과 함께 할 삶을 생각하면 왜 안 그랬겠어요. 그날도 저는 여느 때와 같이 당신에게 전활했죠. 주말에 보고 싶다고 말이예요. 뜻밖에 당신은 다른 약속이 있다며 차갑게 거절했죠. 그렇다고 저는 당신을 전혀 의심치 않았어요. 당신을 믿었으니까요. 당신과의 만남이 없자 갑자기 허전해 졌어요. 꿩대신 닭이라고 하죠. 이웃에 살고 있는 사촌 동생을 불러 당신과 자주 갔던 광릉수목원에 갔었죠. 아마 당신이 그리워서였겠죠. 당신과 함께 걸었던 숲길을 여기 저기 걷다 수목원 안에 있는 작은 호수에 이를 무렵 먼발치에 당신이 세련되고 예쁜 아가씨와 세상 즐거워하며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어요 점차 우리 쪽으로 다가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준, 당신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어요. 아차 싶었으나 저도 속에서 불같이 뜨거운 질투심이 일어 이성을 잃어나 봐요.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죠. 저는 당신이 그렇게 화난 표정을 본 적이 없었어요. 아마도 제 사촌 동생을 남자친구로 오해했던 모양이었어요. 그러나 저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꼈어요. 죽도록 나를 사랑한다는 당신이 저를 속이고 다른 여성과 데이트를 하다니 저는 배신감에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당신한테 연락만 오기를 기다렸죠. 미안하다고, 그건 오해였다고 변명이라도 해주길 기다렸죠. 하지만 끝내 당신은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제가 자존심을 버리고 당신한테 만나자고 전화를 했죠. 저는 당신 없인 살 수가 없었으니까요. 여의도 카페에서 다시 만난 당신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치 타인처럼 앉아만 있었죠. 이제는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질 않다는 표정으로요. 그런 당신의 태도에 저도 마음을 바꿔 먹었어요. 한 시간을 서로 말없이 앉아 있은 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제가 일어서며 말했죠. “ 그래, 이제 우리 그만 만나요.” 그 말에 당신도 놀랬는지 일어 선 저의 팔을 힘없이 잡더군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당신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잡은 팔을 풀어 주더군요. 카페를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몰랐어요.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버스정류장에서도 선듯 버스에 오르질 못하고 당신이 내게 와 주기만을 기다렸어요. 그랬더라면 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끝내 나타나질 않았어요. 당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당신을 잊기 위해 사랑 없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어요. 그러나 당신이 아닌 어떤 사람과도 행복해 질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예요. 저는 이미 당신만이 필요한 여자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불행했어요. 당신을 기억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아파 오더니 악성 혈액 림프종이 찾아 왔어요. 살아 보겠다고 오늘까지 버텨 왔어요. 그러나 이젠 더 이상 버틸 힘도, 희망도 없어 졌어요. 마지막일지라도 준,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사랑했어요. 안녕, 내 사랑. 천상에서 다시 보고 싶다고 하면 저의 욕심일까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을 거예요.준, 내 사랑. 이제는 안녕,

 

 준은 흐르는 눈물을 닦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꼬일 대로 꼬인 문제의 실마리가 풀렸으니까. 그럼 그렇지. 주영이가 나를 두고 그럴리가 없지. 준은 가슴이 찢어 지는 통증을 느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실 그 날 준의 옆에 있었던 아가씨도 미국에서 방문차 나온 사촌 여동생이었다. 수십 년을 두고 준을 괴롭혀온 인물이 주영이의 사촌 동생이었다니. 평생을 걸쳐 주영이를 원망하며 살아 온 자신이 죽도록 미워졌다. 미치도록 주영이가 보고 싶어졌다. 준은 주택가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힘껏 주영이가 있을 하늘을 향하여 목청껏 외쳤다.” 주영아~”


 식탁에 점심상을 차리던 준의 아내는 커다란 고함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싶어 밖을 내다보는 순간 준이 옆으로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준의 아내는 “아니. 저이가” 하면서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준의 아내는 불길한 생각에 황급히 들고 있던 휴대폰으로 911에 신고를 했다.


 “여봇, 정신차려요. 도대체, 왜 이래. 응” 준의 아내는 쓰러져 있는 준을 흔들며 말했다.


 “응, 나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고 준이 말했으나 준의 아내는 듣지를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며 눈앞에 향긋한 아카시아 숲길이 펼쳐졌다. 준은 기분이 좋아져 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 순간 길이 끝나고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꽃길이 나타났다. 준이 걸음을 멈추고 전방을 바라보니 한 여인이 온갖 꽃으로 장식된 아치형 문 앞에 서 있었다. 준이 그 여인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자 여인은 준을 보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준이 점점 다가 갈수록 익숙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주영이었다. 준은 반갑게 웃으며 주영의 손을 잡았다. 주영이 옆에는 낯선 듯 낯익은 어린 천사가 주영이의 다른 손을 잡고 준에게 귀엽게 웃어 보였다. 이윽고 셋은 아치형 문을 지나 꽃길을 따라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
 

김   희   중
오클라호마 거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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