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수필 겨울을 건너는 법

2018.12.28 09:08

ohmily 조회 수: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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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겨울을 건너는 법

 

단풍으로 불타던 가을 숲은 이제 캄캄해졌습니다. 
 “아니! 어디서 온 걸까?” 
 어디에서 눈이 맞았을까요. 춥고 캄캄한 겨울나무 위에 녹색 이파리들. 속이 다 타 숯덩이가 되어버린 몸뚱이에 새살 돋았습니다. 손목을 잡고 끌고 온 것도 아닐 텐데 겨울 가지 맨살 위에 봄이 피었습니다. 높아서 추운 겨울 가지 위에 쓰라리고 아름다운 그리움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난데없는 소식입니다. 어떻게 연통이 닿았기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살림을 차리고 주소를 옮겨온 걸까요. 더부살이 이파리들이 녹색 촛불을 켜고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눈길을 잡아당깁니다. 물이 올라 나무가 환해졌습니다. 조용히 동면에 들어가는 나무를 깨우고도 저리 당당한 더부살이. 작은 이파리 팔랑이며 맑은 바람을 끌어당겨 몸을 씻깁니다. 휘파람 불어 그리워하다 말다 할 틈도 주지 않고 나무의 마음을 뒤집어놓고 있습니다.

 

 짝 짝! 껌 씹는 소리가 들립니다. 수돗가에 앉아 걸레 빠는 국민학생 미숙이는 눈을 흘깁니다. 곱을 손을 녹이는 둥근 입술에서 뭉게구름이 피어납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얼굴이 동그란 고모가 마루 끝에 앉아 얄궂게 웃고 있습니다. 그날따라 노을은 왜 그리 어여쁜지 유난히 동그란 고모의 얼굴이 사과처럼 발갛게 익었습니다. 그래서 미숙이는 더 약이 오릅니다. 은비녀를 훑고 온 빛이 젖은 눈에 별처럼 뜹니다. 
 “엄마, 고모는 언제 집에 가?”
 “그런 소리 하면 못써!” 
 퉁퉁 부은 목소리로 야무지게 묻는 미숙이에게 엄마는 따끔한 소리로 박음질을 합니다. 튀어나온 얼은 입술에 빗장을 겁니다.

 

 고모부가 가끔 들러 놓고 가는 군것질은 미숙이에게는 시렁 위의 꿀단지였습니다. 마치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처럼 달달한 것들이 고모의 오므라진 입속에서만 오물오물 녹았습니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아 껌만 씹던 고모는 우리 집에서 당당한 더부살이를 하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따라 미국에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 워싱턴에서 컴퓨터 회사를 하던 고모의 아들, 그러니까 사촌 오빠는 소문난 부자였습니다. 일찍이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국비 유학생이었던 사촌 오빠는 약사인 여자를 만나 미국에 정착하였답니다. 옆에 게스트 하우스가 달린 집에서 살았다니 그럴 만했겠지요. 게스트 하우스에서, 아들 옆에서 살던 고모는 몇 년 후 다시 돌아왔습니다. 바쁜 아들 며느리와 손주들 사이에는 맑은 소통의 바람이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딱딱 껌 씹는 소리만 빈집을 울렸겠지요. 오물오물 군것질만 녹아내린 게 아니라 가슴까지 녹아내렸던 것이었지요. 이민 길에 오르기 전날 밤, 큰오빠는 두 오빠와 나를 불러 놓고 당부를 했습니다. 더부살이에 대한 생각을 당부의 말로 대신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때 나는 내가 세상의 주인인 양 살았습니다. 큰 나무처럼 우뚝 서야만 내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큰 그늘이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열심이라는 명찰을 달고 뛰면 일등으로 살아질 줄 알았습니다. 늘 푸르기만 할 거라 믿었습니다. 실한 과실을 위해 나머지는 솎아내었습니다. 튼실한 열매만을 위해 접목하는 법을 읽혔습니다. 구멍 난 가슴 우리 기워줄 명주실인 줄 모르고 길면 잘라냈고 너덜거리면 끊어냈습니다. 나 때문에 당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다 더부살이 중입니다. 세상이라는 곳에 불시착해 서로가 당신이라는 나무 위에 뿌리를 내렸지요. 당신은 당신 가슴 속에 더부살이하는 내가 있어 살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린 내 등은 아랫목처럼 따뜻한 당신의 등이 덥히지요. 더부살이 한 해가 또 다 가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날들이었습니다. 자는 나무 깨울까 봐 조용조용 걸었습니다. 잠시 한 철이었겠지만 당신과 걸은 걸음이 내 평생이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숨결로 내 마음결을 닦았습니다. 당신의 마음 거울이 곧게 서는 법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이 있어서 하루하루를 넘겼습니다. 

 더부살이는 사방이 트인 맑은 바람으로 몸을 씻어야 합니다. 버선발이 아닌 흙 묻은 흙발이어야 합니다. 딱 맞는 뾰족구두가 아니라 수더분한 털신이라야 겨울을 건널 수 있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통속이어야 합니다. 애잔함과 울렁임이 한 그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뺄셈과 나눗셈은 빼버리고 덧셈과 곱셈으로 공식을 기둥처럼 세워야 합니다. 작은 잎이라도 오므리지 말고 펴야 그늘이 넓어집니다. *
 

그리움도 
뿌리를 내리는가 봐

 

타도 타도 더 타야 하는 가슴에는
더욱 그러는가 봐

 

떨려서 
그렇게 떨려서 돋아낸
겨울가지 맨살들
그저 한 철 머물다 갈 생이어도
제 몸 되어버린 그리움을 어찌하리

 

겨우살이는 그렇게 
가슴에 뿌리내리는 세월인가 봐

 

 졸시 (겨우살이), 전문

 

김미희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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