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수자 칼럼 

제23화. 최칠칠 최북과 반 고흐의 자화상

 

한국 회화집을 넘기다가 깜짝 놀라 오래 들여다 본 그림이 있었다. 다름 아닌 조선후기 화가인 최북(崔北·1712~1786)이 그린 자화상이었다. 점잖게 생긴 초로의 위엄 있는 사대부의 초상화였는데 한쪽 눈이 감겨 있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는 마치 사진 수정하듯 결점 없이 그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어찌하여 최북은 자신의 애꾸눈을 드러내어 그렸단 말인가. 최북에 대한 이야기는 영의정을 지냈던 당대 최고의 문장가 남공철(南公轍·1760-1840)의 문집 <금릉집>에 최북의 전기 <최칠칠전>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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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은 조선 후기 숙종 영조 때의 화가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호생관(毫生館)·월성(月城)·성재(星齋)·기암(箕庵 )·거기재(居基齋)·삼기재(三奇齋)이다. 이름 최북( 崔北)의 북(北)자를 반으로 쪼개서 파자해서 칠칠(七七)로 지었으며, ‘붓(毫) 하나로 먹고 산다(生)’고 하여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고 가장 많이 사용한 호이다. 한국의 역사 속 인물 중에 이렇게 많은 별호를 가진 사람은 별로 없다. 다양하고 괴팍한 그의 별호처럼 그는 그림과 글에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최북의 삶은 기이한 행동의 연속이었다. 그의 성품은 매우 곧고 격하기 쉬워 조금이라고 자기 뜻에 거슬리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를 취객이라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광인이라 했다. 최북은 술을 무척 좋아하여 하루에 보통 5-6되의 술을 마셨다. 술만 보면 책이고 돈이고 전부를 팔아 술을 사서 마시곤 하여 가산을 다 탕진하고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때 그는 왕족과 바둑을 두다 한 수 물려달라는 요청에 바둑알을 쓸어버리며 “바둑은 본래 놀자고 두는 건데, 만약 물러주기만 한다면 죽을 때까지 한 판도 끝내지 못하겠구려”라며 훈계를 했다. 그가 금강산의 구룡폭포 앞에 섰을때 술에 취해 “천하 명인 최북이 천하 명산에서 죽는다”라고 외치며 금강산 구룡연에 뛰어내려 자살하려 했던 일화도 있다. 또 최북은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그때 남긴 화첩들이 남아있고, 일본에서 그림으로 명성을 얻어 귀국 후에도 그의 그림을 사러 일본인들이 평양까지 다녀가기도 했다. 별난 성품만큼 그의 외모도 특이했다. 작은 키에 애꾸눈이었던 것이다. 그의 과격한 행동이 스스로 눈을 멀게 했는데, 어떤 사람이 최북에게 그림을 요구 하자 그 사람이 맘에 안 들었던지 거절했다. 이에 그림을 원하던 사람이 항의하자 최북은 격분하여 “내 눈이 삐었구나. 저자를 욕할게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렸구나 “하면서 자신의 한 눈을 찔러버렸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자신의 눈 탓이라며 자해한 것이다. 화를 참지 못하고 차마 상대방을 어쩌지 못하고 그 분풀이를 자신에게 한 것이다. 이에 문인 조희룡은(1789-1866) “최북의 풍모가 무섭구나. 왕공 귀족의 노리개 감이 되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찌 스스로를 괴롭힌단 말인가” 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를 아낀 또 한사람 신광하(申光河·1729-1736)는 최북을 애도하는 시를 남겼다. ㅡ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외눈이었다네만/ 귀한 집 병풍으로는 산수도를 치는데 / 술에 취해 미친 듯 붓을 휘두를 요량이면 큰집 대낮에 산수풍경이 생겼다네/ 그림 한폭 팔고는 열흘을 굶더니 / 어느날 크게 취해 한밤중에 돌아오는 길에 성곽 모퉁이에 쓰러졌다 / 북망산 흙속에 묻힌 만골(萬骨)에게 묻는다 / 어찌하여 최북이는 삼장설(三丈雪)에 묻혔는고..." 라고 읊었고, 정약용(1762-1836)도 최북에 대해 “ 근세의 이름난 화가인데, 만년에 한 눈이 멀었다. 게다가 끼던 안경을 착용하던 중 알 하나가 빠졌는데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성격을 얼추 엿볼 수 있다.” 고 회고했다. 최북은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훼(花卉), 괴석(怪石), 고목(枯木)을 두루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와 메추리를 잘 그려 최산수, 혹은 최메추라기라는 별칭을 얻었다. 필법이 대담하고 솔직하여 구애받은 곳이 없었다. 그는 49세에 서울에서 죽었는데 그의 호 칠칠이 (七 x七= 49)그의 죽음을 예고 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미법산수도>를 위시한 <송음관폭도(松陰觀瀑圖)> (덕수궁 미술관 소장)와 <수하담소도(樹下談笑圖)>, <설산조치도(雪山朝雉圖)>, <의룡도(醫龍圖)> (개인 소장)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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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

자신의 눈을 찌른 최북만큼 격정적 성격이었던 화가는 네델란드의 화가 반 고흐(1853-1890)다 그도 격분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른 일화를 남겼다. 고흐는 세인들에게 너무 많이 알려져서 새삼 그의 그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족이 될듯하다. 고흐는 네델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지원하였으나 실패했고 거의 30세에 자기 재능을 살려 미술에 입문하였다. 37세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900여점의 작품과 1100여점의 습작을 남겼다. 이 많은 작품을 단 10년 동안에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그림 한 점 팔아보지 못하고 늘 쪼들리는 생활을 했다. 오직 그의 착한 동생 데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연명하였는데, 지금 그의 그림들은 전 세계의 일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고, 그림 값은 하나같이 수백만 달러가 넘는다. 고흐는 흔히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며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등 거의 모든 미술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고흐는 유달리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그는 1886년부터 1889년 사이에 37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고흐는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을 보고 그리기도 하였고, 때로 사진을 보고 그리기도 하였고, 자신의 얼굴골격을 더듬어가며 그리기도 하였다. "나는 내 초상화를 불교 승려의 초상화, 영원한 부처에 귀의한 수도자의 초상화처럼 여긴다네"라고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 쓰고 있듯이 그의 초상화는 세상을 초월한 구도자의 모습이다. 고흐는 스스로를 인물화가라고 했다. 그는 종종 ‘내 영혼에까지 감동을 주는 것은 오직 인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가 화폭에 담는 인물은 대부분 주변사람이거나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고흐는 사람의 얼굴을 통해 그 내면을 들여다 보았고 , 그 인물이 살아온 내력을 표현하는 는 통찰의 화가였다. 그는 말년에 파리에서 같은 화가인 고갱(Paul Gauguin, 1848-1903)과 함께 산 적이 있다. 고흐와 고갱은 함께 살며 작품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작품 제작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갱과 자주 성격 충돌을 일으켰고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다. 1888년 12월23일 고흐는 심한 배신감으로 격분한 나머지 자신의 오른쪽 귀를 면도칼로 잘라버렸다. 이 사건 후 고갱은 파리로 떠나고 말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고흐는 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의 자화상을 두 점이나 그렸다. 하나는 일본판화를 배경으로, 다른 하나는 붉은색을 배경으로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이다. 오른 쪽 귀를 붕대로 칭칭 동여맨 홀쭉하고 핏기 없는 얼굴, 광대뼈가 들어나고 고뇌에 찬 푸픈 눈동자, 거기엔 인생고뇌의 처절함이 배어있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이 했던 아름답고 섬세한 표현방법 대신 그는 투박하면서 박력 있는 필치와 강한 색채를 구사했다. 그런데 그는 왜 귀를 잘랐을까. 신체부위에서 하필 귀를. 그를 좋아하던 여자가 볼품없이 생긴 고흐의 얼굴 중에서 잘 생긴 부분은 귀라고 했기 때문이다. 고갱과 말다툼을 하다가 고갱에게 심한 말을 들었고 그런 말을 들은 자신의 귀가 저주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귀 울림증을 앓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압생트(absinthe)라는 독한 술에 취해 일시적인 환각 상태에서 귀를 잘랐다...등등 설왕설래가 그치지 않고 있다. 그가 왜 귀를 잘랐는지는 답은 미궁이다. 그러나 자신의 귀를 자른 행위는 그의 절대 고독의 한 표현이었음을 알게 한다. 불쌍하고 가엾은 빈센트 반 고흐. 진즉 저 세상이 그의 고향이었으므로 지금은 그곳에서 안락을 누리고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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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재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