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수필 시인들 천지를 품다

2017.08.30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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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시인들 천지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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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젖히고 하늘을 살폈습니다. “다행이다. 비는 안 오니까.” 왠지 편해 보이지 않는 날씨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여행 둘째 날. 출발 시각까지는 사십여 분 남았으니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뒤바뀐 시차에도 몸이 잘 따라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일정은 모두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간단하게 호텔 조식을 마치고 짐을 챙겨 버스에 올랐습니다. 멀리 미국에서 왔다는 배려와 사랑으로 나는 맨 앞 좌석에 앉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출발하기가 무섭게 확 트인 차창으로 달려드는 풍광에 사로잡힌 나는 이대로 끝없이 달려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8명의 시인을 태운 버스는 백두산 천지 등정을 위해 연길시를 떠나 서파산문으로 출발했습니다. 

 

 눈에 띄게 한글 간판이 많은 연길 시내를 빠져나와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광활한 대지에 끝도 없이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터를 잡기 위해 유랑했을 간도. 이 땅을 기어코 지켜내야 한다는 우리 조상들의 결기인 듯 옥수수밭은 청록색 줄기를 곧게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민 초기의 내가, 거기 그렇게 푸르게 서 있었습니다. 무슨 놈의 역마살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태어나 내 나라 내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터를 잡아야 했을까요. 이리 가도 저리 가도 둥둥 떠 있는 구름처럼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요. 먹구름이 되어버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후두두 빗방울이 창문을 먼저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연길은 80만 명의 재중동포가 거주하는 중국 최대의 조선족 거주 지역이지요.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혼을 숭배하고 계승하기 위해 여러 행사가 매년 행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해마다 6월 9일을 된장 담그는 날로 정해 “생태된장문화축제”를 개최해 타민족들과 어우러져 민속문화전시, 민속가무표현, 된장담그기 등과 조선족 전통음식문화를 체험하기도 한다지요. 또한, 그다음 날 10일에는 “된장술시음회”를 하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끼니마다 올라오는 된장에 상추쌈이 최고였습니다. 살짝 맛만 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향을 지닌 된장술도 일품이었습니다. 조선족은 그렇게 우리 민족의 애환을 그리며 우리 것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상은 우리의 6~70년대를 보는 듯했습니다. 드문드문 무리 지어 있는 시골 동네 풍경은 파란 함석지붕에 크기와 모양이 같아 사회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조선족과 한족의 집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지붕의 모양새였습니다. 조선족의 집은 기와지붕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우리 것을 고집하며 사는 듯했습니다. 그에 비해 한족의 것은 시골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개집처럼 일자로 되어 있었지요.   

 

 10%의 확률. 그것이 출발할 당시의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씨 상태였습니다. 약 5시간 30분을 가면서 날씨는 활짝 웃다 흐리다 가끔 눈물도 흘리면서 있는 대로 변덕을 부리며 우리의 애간장을 녹였습니다. 전생에, 혹은 조상이 나라를 구한 사람들이나 볼 수 있다는 천지. 열 번을 가도 열 번을 다 못 보고 오는 사람도 있으니 만약에 보지 못하더라도 실망은 하지 말아 달라고 이렇게 저렇게 우리를 위로하느라 애쓰는 가이드를 보며 내심 “아. 틀린 모양이구나!”  하고 마음을 접었다가는 활짝 웃는 날씨에 다시 폈다 하기를 수십 번. 좁은 이차 선 도로는 군데군데 공사 중이었습니다. 공중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길을 뚫고 가는 이 층 버스 안에서 탄성을 지르며 가끔 모든 것을 잊고 무법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별로 매표소를 지나 얼마간을 걸어가니 백두산 중턱까지 올라가는 이동 전용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파에서 오르는 길은 북파에서 보다 비교적 완만하다는 데도 버스로 산을 오른다는 것은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올라갈수록 쭉쭉 뻗은 편백, 자작나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목한계선을 따라 숲이 사라지고, 대신 작은 꽃들이 온 능선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첫 계단에 올라섰습니다. 계단마다 이름을 붙여 봅니다. 이제는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들의 이름부터.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 그리운 사람들. 아주 잊고 싶었던 이름까지. 고향 집 화단에 피었던 채송화 봉숭아, 꽃 이름 나무 이름. 1,442개의 계단을 오르며 단 하나하나마다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눈길 닿는 자리마다 금련화가 피었습니다. 그 노란 눈동자마다 별이 떴습니다. 

 

 삐그덕 거리는 두 다리를 용케 달래가며 마지막 계단에 오르는 순간 푹신한 양털 이불을 걷어내며 천지는 환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환희였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큐 사인도 없이 막이 올라간 뮤지컬의 배우가 되어 있었습니다. 온갖 소재가 뒤범벅되어 무대를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속내를 활짝 열고 반기는 천지를 보며 시인들은 어떤 문장을, 어떤 단어를 떠올렸을까요. 그저 바라다볼 수밖에 없는 북녘땅 장백산맥 등줄기에 어느 시인은 아버지의 함자를 새겨 놓았겠지요. 어느 시인은 한 줄 시를 지었을 거고요. 누구는 부르지 못할 이름을 천지 마음자락에 적어 놓았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천지를 품었습니다. 내려오는 첫 계단에 서서 바라본 광활한 평원은 고요했습니다. 커튼콜을 마친 무대처럼 내려오는 길은 길고 허전했습니다. 피붙이라도 떼어놓고 오는 양 자꾸 뒤돌아보게 했습니다. 어느새 천지는 회색 구름을 불러들이고 있었습니다. 

 

 

걸음에 걸음을 보태면

바람이 될까요

몸보다 무거운 마음 버리면

오르게 될까요 

 

삼켜온 것들

하고 싶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

1,442계단 쌓아

부를 수 없는 이름 없는 세상을 위해

오르고 싶습니다

 

눈길 닿기만 해도 금련화는

하늘까지 채우는 별로 뜨는 밤

액정 화면 속에서만 계시는 

백두白頭의 푸르른 암묵을 깨닫기 위해

당신에 스며드는 꿈을 꿉니다

 

 - 김미희, (당신에게 가는 길)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