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수자 칼럼  

제25화 알렉산더와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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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이어) ...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인근 도시국가를 정벌하고 남하하여 이집트를 쳐들어갔다. 그는 이집트의 페르시아 인을 축출하고 이집트 델타 지대의 서쪽에 있는 항구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을 부쳤다. 이어서 바빌론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여 페르시아의 핵심부를 점거하였다. 마침내 숙적이던 다리우스 3세를 제거하고 페르시아의 왕을 겸하였다. 그는 멈추지 않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아프카니스탄을 지나고, 더욱 남하하여 인더스강까지, 마침내 갈 데까지 간 것이다. 


 알렉산더의 군대가 인도의 인더스 강까지 갔을 때는 군대는 쇠진하였고 더위와 우기로 진퇴양난의 형편이 되었다. 오랜 전쟁과 객지생활은 군인들과 알렉산더를 쇠약하게 만들었다. 인도에서 바빌론으로 돌아온 뒤 알렉산더는 일종의 열병에 걸려서 BC 323년 33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사학자들은 알렉산더의 요절은 신의 행운의 선물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단시일에 이룩된 제국을 다스린다는 것은 정벌보다 더 큰 난관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사후 알렉산더 제국은 갈라지고 이때부터 헬레니즘(희랍문명)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헬레니즘 문명을 세계에 퍼뜨린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짧은 생애에 저 대 제국을 건설한 것처럼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17세 소년으로 왕위에 올라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 나라를 아시아의 고구려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고구려는 27왕을 거치며 705년 계속 되었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왕이 19대 광개토왕(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그의 이름은 담덕이다. 담덕은 12살때 태자로 책봉되었고 18대 소수림왕이 후사 없이 죽자 고구려의 19대 광개토왕이 되었다(AD392). 

 

 광개토왕의 정복 전쟁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작되었고 고구려 주변의 도시와 소국들을 귀속시켰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동은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은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고, 남은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은 말갈에 이른다. 동서는 3100리, 남북은 2000리에 달했다”고 적고 있다. 

 

 광개토왕은 태왕으로 불렸다. 태왕은 중국의 황제처럼 여러 민족과 국가를 아우른 제국의 최고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영락(永樂)이라는 독자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연호란 아시아의 군주 국가에서 사용됐던 일종의 달력으로 군주의 치세 연차를 헤아리던 방법이다. 당시 연호는 중국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은 고구려의 국력이 중국의 여러 왕조와 어깨를 맞댈 정도로 강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광개토대왕릉비 : 그의 업적과 고구려의 역사가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광개토대왕릉비(중국 집안시 소재)가 발견되면서부터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20대 장수왕(414)은 부왕의 위엄을 나타내려고 광개토왕릉비를 세웠는데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을 나타내고있다. 고구려 수도 환도성 옛터 근처인 남만주 집안현에 세워진 이 비는 높히가 6미터가 넘는 우람한 자연석에다가 1,775자의 글자를 새긴것이다. 비문은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할때부터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나기 까지의 내력을 적은 것이다. 지금은 글자가 비바람에 닳아서 잘 읽을 수 없지만 유추해보면 용맹스런 무력을 자랑스러운 일임을 강조하고 피정복자를 관대하게 대했다는것과 백성을 잘 살도록 보살펴서 곡식이 풍성하고 평화로웠다고 큰 찬사를 보내고있다.

 

 광개토대왕이 넓혔던 영토는 서쪽으로는 지금의 몽골 동쪽에 해당되는 대흥 안령산맥과 시라무렌 강 유역,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 일대, 동쪽으로는 두만강을 넘어 목단강 유역의 연해주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거란 정벌은 광개토대왕의 제국 건설 구상을 잘 보여준다. 대규모의 원거리 원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광개토대왕의 국제정세를 읽는 뛰어난 감각과 지략 덕분이었다. 

 

 사학계는 광개토대왕의 제국 건설이 단지 영토 확장의 의미를 넘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알렉산더대왕이 헬레니즘 문명을 퍼뜨렸던 것처럼 광개토대왕 대에 이르러 비로소 백제·신라·가야가 모두 고구려의 직·간접적인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다. 고구려의 성 쌓는 기법, 토기 제작 기법, 무덤의 형태, 건축술, 무기와 갑옷 등 고구려의 문화가 백제·신라에 전파된점은 고구려가 삼국 간 문화적 동질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훗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신라였지만 삼국통일의 씨앗을 뿌린 것은 광개토대왕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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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재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