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박혜자 수필 돌아온 가을

2017.09.2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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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자의 ‘세상 엿보기’ ]

돌아온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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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 같은 여름이 지나갔다. 텍사스 남쪽 휴스턴에서는 허리케인 하비가 많은 상처를 남기고 갔고, 동족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김정은의 충동적인 미사일 발포는 날마다 온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한국에 있는 친척들은 연일 홍수 피해를 물어왔고 우리는 뉴스를 보며, 한국에 살고 있는 친척과 친구들이 전시 같은 상황에서도 안녕 한지를 걱정하고 있다. 전인권의 노래 <걱정말아요, 그대>를 날마다 부르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제 조금 숨을 쉴만하니 허리케인 어마가 캐리비안의 섬들과 플로리다를 강타하며 지나갔고, 또 다른 허리케인 호세는 출격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지금 플로리다에서는 65% 가정이 전기가 끊기고 조지아주 와 지난여름 가보았던 사우스 캐럴라이나의 아름다운 해변도 쑥대밭이 되었다. 거대한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과 인간이 만든 것들이 얼마나 초라하고 쉽게 무너지는 지 ‘노아의 방주’가 절로 생각이났다. 또한 홍수로 물에 잠긴 집에서 아이들의 앨범을 제일 먼저 챙겨 나오는 휴스턴주부를 보았다. 문득 내가 그런 경우라면 무엇을 제일 먼저 챙겨가지고 나올 것인지가 스스로 궁금해졌다.

 

예전엔 집문서나 은행통장, 보험증서 같은 것이 모두 서류로 되어 있어 집을 두고 피신을 해야 하는 경우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먼저 챙겨 나왔을 것이다. 그 다음엔 현금이나 귀금속 일터인데 미국에선 이런 것들을 모두 은행 금고에 보관하는 편이니 요즘은 그럴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그렇다면 무엇일까? 아마도 모든 것이 저장되어 있는 휴대폰이나 노트북이 아닐까? 모든 인적네트워크는 휴대폰에, 가정의 대소사는 모두 노트북 안에 들어있으니 만일 이런 것들이 분실된다면 일상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불편과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들 앨범을 먼저 챙겨 나오는 주부의 모습이 난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건 아이들과 함께한 소중한 시간들을 간직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 일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 속에 들어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물속에 잠기게 할 수 없는 부모의 마음 일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시각에 가장 오래 남는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한 장의 사진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세계를 바꾸기도 한다. 빛바랜 유년시절의 사진 한 장은 그리움을 넘어 그 시절의 삶을 대변한다. 집안 곳곳에 있는 아이들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의 추억이 절로 고개를 들며 우리를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데려가 준다. 커서 과학자가  된다든 아이는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흐드러지게 핀 장미 옆에서 차렷 자세를 한 채 활짝 웃고 아이의 모습은 ‘벨 에포크’( 참 좋은 시절)이란 말이 절로 떠오르게 만든다.

 

조경가로서 토속적 풍경에 대해 영향력 있는 글들을 남겼던 미국의 존 B 잭슨은 <폐허의 필요성>이란 글에서 ‘폐허는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근원을 제공하며, 우리로 하여금 무위의 상태로 돌아가 그 일부로 느끼게 한다’고 하였다. 건축과 도시는 무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건축의 완공은 그 속에서 살게 되는 거주자의 삶으로서 이루어지며, 도시 역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붕괴와 몰락을 준비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끔찍한 폐허의 현실을 응시하는 일은 괴롭다. 그저 소식을 듣기만 해도 그런데 당사자들은 오죽할 까 싶다. 그중엔 홍수보험이 없는 집들이 더 많다고 하니, 이 재해의 복구엔 오랜 세월이 걸릴 것만 같다. 그래도 십시일반으로 여기저기서 성금을 모금하고, 파이오니아 의 후예인 이곳사람들은 정부를 원망하기 보다는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 복구하기를 더 희망한다고 하니, 다행이 아닐수없다. 어쩜 허리케인 보다 더 강력한 것은 인간의 드높은 의지와 생명력 일 것이다. 


폐허의 뒤에 돌아온 가을, 모든 것이 휩쓸려 갔고 무너지고 사라진 지금, 그래도 들판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으며, 농익은 열매들은 완성을 향하여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거듭 거듭 새로워지는 길은 무에서 유를, 유에서 무를 창조하는 길, 어느새 가을이 우리 곁에 와 있다.

 

 

쉽게 지워지는 발자국이 어디 있을까
긴 여름동안 나무를 눕힌 바람의 입술이 붉어
물이 집을 쓸어간 뒤에도
남아서 새로 집을 짓는 사람들이
대문을 열어놓고 길을 찾는 9월
저를 싫어하는 지도 모르는 비가
충만한 강에 몸을 더한 뒤
9월의 산과 바다를 껴안고 간다 

 

 강영환의 시  <구월 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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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자
시인 /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