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잘 있나요. 반딧불 내 사랑!

 

 늦은 밤에야 일이 끝났습니다. 차고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반짝반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반딧불이었습니다. 오늘도 수고했다고 마중 나온 모양입니다. 십여 년 전, 그러니까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눈에 띄지 않아 잊고 있었지요. 여름 끝자락에서 다시 찾아온 반딧불이를 보고 소리 내 소원을 빌었습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처량하기까지 했는데 얼마나 반갑고 신기하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봄부터 여름 내내 많은 일을 겪으면서 좀처럼 태연해질 수가 없었던 내게 친구처럼 떠올려 늘어진 어깨 추슬러 보라고 왔나 봅니다. 
이십여 전의 일입니다. 친구 전화 한 통으로 단숨에 캔사스로 달려간 적이 있었지요. 때마침 독립기념일이어서 일주일간 가게 문도 닫았습니다. 작은 아이는 너무 어려서 할머니한테 맡기고 큰 아이랑 셋이서 출발했습니다. 장거리 여행은 처음이면서 사전 지식은커녕 달랑 지도 한 장만 들고 길을 떠났으니 겁도 없었습니다. 개스는 달랑거리는데 마을은 보이지 않고,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지도만 보고 또 보며 알 수 없는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장장 9시간을 달려 천신만고 끝에 친구와 재회를 했습니다. 
그 친구 약혼식을 마지막으로 소식도 모른 채 십수 년을 살다 엉뚱한 캔사스 시골에서 만났습니다. 다시 만난 우리는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지요. 장교 교환 연수차 2년간 캔사스에 머물기로 했다는 친구는 행복했습니다. 한 살 터울로 그녀를 쏙 빼닮은 딸과 남편의 붕어빵 아들.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시골로 갔었지요. 그곳은 반딧불로 꽤 유명하다고 했습니다. 야영지에는 캠핑 나온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두 남자가 그릴에 고기를 굽고 수선을 떨어 준비한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텐트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화려한 독립기념 불꽃놀이는 없었지만, 수만 마리의 반딧불이 빛을 발하며 사랑을 찾는 군무를 보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좋아서 조잘대고 우리의 두 남편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가끔 큰 웃음으로 행복을 선사했습니다. 우리는 친구들 하나하나 호명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단발머리 추억 속에서 울다 웃으며 꿈에도 생각 못 했던 낯선 이국에서의 해후를 만끽했지요. 
그 친구와는 중학교 일학년 때 짝꿍으로 만나 여중고, 육 년의 단발머리 세월을 함께했습니다. 친구의 집 근처에는 남자 고등학교가 있었지요.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는 친구는 남학생들의 시선과 많은 연애편지를 받아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빠지지 않는 외모에 당차고 반듯한 성격에 겸손하기까지 했으니 참 멋졌지요.   
그 예쁜 친구에게는 오빠가 있습니다. 청정지역에서만 서식한다는 반딧불이. 반딧불이가 내는 빛은 사랑을 찾아 헤매는 구애의 빛이라지요. 구애의 빛을 발해보기는 커녕 단 한 번의 연애사도 없이 결혼한 내게 그렇다 할 가슴 설레는 사건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오빠는 몰래 꺼내 먹는 알사탕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친구들과 함께 그 친구 집에서 청춘의 여름밤을 보내게 되었지요. 아마 여고 삼학년 때의 일이었을 겁니다. 화장실을 찾아 나온 나는 반딧불이 군락을 이룬 평상 위에서 어머니 어깨를 주무르며 담소를 나누는 오빠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 다정한 풍경이 얼마나 좋았던지 결혼은 필수가 아니고 선택이라며 남자 보기를 우습게 보던 내가 그 오빠한테 시집가겠다고 마음먹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요. 얼마 후 인사도 못 하고 미국에 이민을 온 나는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야 한국행을 허락받았습니다. 이유인즉슨 신랑감을 골라 오라는 것이었지요. 만나보고 싶은 다섯 명의 후보 명단을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습니다. 후보 일 순위가 바로 그 오빠였지요. 하지만 친구 약혼식에 나타난 오빠는 머리가 유난히 큰 갓 난 아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친구와 그 오빠랑 함께 저녁을 하게 되었지요. 갑자기 삼십여 년 전 큰 올케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난 얼마 뒤 모르는 군인이 우리 집 주위를 맴도는 것을 보았다고요. 꼭 나를 만나러 온 것 같았다고요. 지금도 그게 누구였을까 궁금하다고요. 그랬더니 오빠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게 나야 하며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장가는 왜 그렇게 일찍 갔다며 오빠를 보자마자 내가 화를 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바로 그 친구의 약혼식 날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반딧불이 반짝반짝 사랑을 호소하던 그 밤, 다정한 오빠한테 반해서 오빠한테 시집을 가도 괜찮겠다 생각했노라 털어놓았지요. 이젠 숨길 일도 설렐 일도 아니라 생각했는데 막상 말하고 나니 이 나이에도 쑥스러운 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아무에게도 못 했던 얘기들을 풀어 놓았지요. 얘기를 다 듣고 난 오빠는 태연하게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아무 말이 없었지요. 오빠와의 핑크빛 만남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인연이 아니었던 것은 아쉽게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을인가 봅니다. 고향이 그립습니다. 유난히도 가을이면 별빛이 곱게 내려앉던 마당 가 단감나무가 그립습니다.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쓸어 놓은 하늘마당에 마실 나온 별들이 반딧불이처럼 구애하는지 왁자합니다. “잘 있나요. 반딧불처럼 환했던 그대여!”
 

말 속의 먼지를 털어내려고
가슴에서 주름을 떼어내려고
고개의 각도와 눈의 각도를 조정하려고
억지로 가위를 들이대지 말 일이다

밀실과 광장의 공존을 꾀하거나
속편續編 이 있을 것만 같은 뇌관을 흔들어 보거나
미련을 찾는 일을 위해
수 없이 반복되는 하루들을 어루만지며
또 하나 빈칸을 따지지 말 일이다

일 순위에서 벗어난 감정으로
지루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날을 위해
채색하는 일이거나
낮과 밤의 길이를 따지기 위해
고개를 젓지 말 일이다

그 어떤 무게를 위해 들렸던 발뒤꿈치를
윤곽만 남은 편편한 일상에 내려
잠시 서서
그래도, 혹은 길을 잃은 듯
그냥 그러면
너의 아름다움은 고이는 것
그래서 내가 되고
알고 있었다는 듯
아침이 정수리에 와 닿는다

 

김미희, (태연하다는 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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