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연작중편 / 土(원시의 춤)舞 <제31회>

 

제3화 / 악몽(惡夢)

 

바(MR) 아탱는 흰색의 마도로스 모자를 트레이드마크처럼 쓰고 다니는 현지인 마을의 지킴이였다. 그는 왕년에 배를 타고 인도네시아 전역을 다녔다는 전력을 푯말처럼 내세우며 동네에서 말발께나 날리는 50대 중반의 사내였다. 듣기로는 그들 네모그룹 멤버들이 이 지역에 둥지를 틀 때부터 터 닦기, 집짓기 등의 작업 시 로칼 인부들을 동원해주거나 부식을 조달하는 등 이른바 ‘한 구찌’잡은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안 그래도 동네 건달 노릇을 하며 현지 주민들의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그는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가게 되고 그 덕분에 이제는 자기 동네는 물론 인근 타 지역 주민들도 괄시 못하는 인물로 성장해있었다. 그런가하면 머리가 잘 돌아가고 잔꾀가 많아 가끔 그들 네모그룹 사람들이 풀지 못하는 관공서 일까지도 그를 내세우면 잘 해결을 해오곤 했기 때문에 한국인 직원들도 그를 대접해주고 있다고 했다.

“물론 잔돈푼깨나 들어가지요. 영감이 노회해서 무슨 일이든 맨 입에 하려하지 않아요. 가끔 골치 깨나 썩히곤 하지요…”

위령제를 지낼 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을 거드는 그를 보고 철민이 물었을 때 정 부장이 귀띔해 준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딜 가나 그런 부류의 감초는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나설 때 안 나설 때를 잘 판단하며 적당히 뒷배만 챙기는 부류가 있나하면, 그야말로 천방지축 아무 곳에서 입질을 하여 주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어이없는 사람들도 살펴보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크든 작든 조직이 움직이는 곳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걸…철민은 이것저것 생각에 머리를 흔들며 시간을 보았다. 2시 반이 조금 넘어있었다. 그는 아탱과 얘기하고 있는 정 부장을 손으로 불렀다. 그가 아탱과 함께 철민에게로 다가왔다. 아탱이 건달 특유의 삐딱한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며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답니다. 말씀 들었다고…아깐 행사 때문에 인사 못드렸다고…”

정 부장이 아탱을 소개하며 빙그레 웃었다.

“반갑소. 우리 회사 많이 도와준다고…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이번 미스터 권 일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정 부장의 통역으로 잠깐 서로 얘기를 나누다 철민은 얼핏 이 영감이 아주 날탕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오히려 경계심이 일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는 정 부장을 향했다.

 

“왜 안 오죠? 신 과장…?”

“별…문제없는 것으로 압니다만…곧 오겠지요. 비행기 시간이 3시 반이니까…아마 곧 도착할겁니다. 아, 저어기…”

정 부장이 갑자기 말끝을 바꾸며 손가락으로 활주로 한편을 가리켰다. 마침 기다렸던 앰뷸런스가 천천히 비행기 뒤쪽 화물칸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들은 우르르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신 과장과 닥터 콤보이, 두어 명의 병원 관계자가 흰 가운을 입은 채 앰뷸런스에서 영구를 내리는 모습이 비쳤다.

 

철민이 맨 앞줄에 서고 이어서 그들은 다시 정렬해 섰다.

“일동 차려~”

정부장이 군대식으로 구령을 외쳤다.

“묵념!...”

철민은 눈을 감았다. 악몽 같은 만 이틀이었지만, 그는 얼굴도 못 본 채 어이없이 떠나보낸 권 대리를 향해 마음으로 깊이 조문하며 한동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ㅡ잘 가요! 당신과 내가 악연인지 뭔지 분간이 안됩니다만, 어쨌건 우리가 서로 인연이 있었던 거는 사실인 것 같소.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하지만, 그래도 헤어지기엔 너무 일러 아쉽네요. 저승에서 극락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바라오! 편히 가시오!

 

 

제4화 / 밀림 야화(野話)

1

 

밤새 스콜이 한차례 지나갔는지 숙소 창 너머로 보이는 캠프 주변의 울창한 나무들이 아주 가깝게 비쳐져 왔다. 밀림엔 막 아침 햇살을 받은 나무 이파리들이 무리 진 채 햇빛을 받아 생선 등허리의 은비늘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철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지난 한 주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마치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차례차례로 떠올랐지만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전 작업 중 덥다고 물에 들어갔다가 느닷없이 익사한 현장 직원의 시신을 자카르타로 실어 보낸 후 숙소로 돌아온 그는 암말 없이 양주 한잔을 맥주 컵으로 부어넣곤 그대로 떨어져 아마도 열 몇 시간은 족히 잤을 것이었다. 현지에 부임한지 불과 일주일도 안 되었지만, 황망한 인사사고가 나자 그 뒤치다꺼리에 보낸 시간이 한 일 년은 족히 지난 느낌이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채 그저 죽은 듯이 한 이틀 잠 속에 빠져들었던 그는 금요일 새벽에야 정신이 들었었고, 바로 우유 한잔만을 마시곤 도망치듯 산속 현장인 베이스캠프로 차를 몰았었다. 뭐 그리 급한 일도 없었지만 왠지 그는 도시의 빌라에 앉아 있으면 온갖 잡생각으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현지인 운전사만을 두드려 깨워 산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그는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헬맷과 군화로 무장을 한 뒤 벌목 현장으로 들어가 그날 오후 한나절 내내 현장직원들의 작업현황을 지켜보았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까마득한 높이에 두 아름이 넘는 나무를 체인 쏘 팀이 밑둥이를 쐐기형태로 잘라내면 그 뒤쪽에서 다시 선을 맞추어 톱날을 꽂았다. 톱날이 나무 밑둥이 중간쯤 도달하면 그 거대한 나무가 서서히 기울어지다가 종래엔 벼락소리와 더불어 지축을 울리며 자빠지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라 할 만 했다.

나무가 쓰러지면 또 다른 체인 쏘 팀이 무슨 곤충처럼 달려들어 위쪽의 잔가지를 쳐내고 양 옆쪽의 중간 가지를 사정없이 잘라 내버렸다. 하늘을 향해 무한히 치솟아 대 야망의 꿈을 키우며 한 백 년 씩을 버티던 한 그루 뿌리 깊은 나무는 그냥 대책 없이 거대한 원형 통나무로 변해버렸고, 사람들은 그 놈을 기중장비에 매달아 로깅 트럭에 옮기곤 했었다. 하루에 대여섯 통이나 잘라낼까? 철민은 한나절을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채 좀 전까지도 생명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생명 없는 것들로 변해지고 있음에 공연히 마음이 착잡해져 왔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