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수필 “I see you!”

2017.04.29 11:53

KTN 조회 수:76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I see you!”

 

단상에 마주 보며 서 있는 신랑 신부를 보고 있자니 제임스 캐머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가 생각납니다. 미 해병대 출신 제이크와 나비족의 여전사 네이티리의 명대사 이였지요. 외계 행성의 ‘나비족’에게는 ‘I love you!’라는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모든 교감의 순간을, 사랑의 감정을 I see you! 라는 말로 표현 하였지요. 그 말을 주고받을 때 흐르던 강하고도 순수한 감정의 교류를 보며 느꼈던 강한 인상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I see you! 마음속에 있는 그리움의 대상이 사랑이 아니라, 마주 보며 서로의 눈빛에서 느끼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찍부터 서둘렀는데 멋을 내느라 시간을 다 잡아먹고 부랴부랴 길을 나섰습니다. 시간을 빠듯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심을 벗어나서 구불구불 시골길을 따라 한 시간 넘게 달려가니 텍사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넓은 대지에 풍광 좋은 식장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오늘은 우리 박 씨, 그러니까 내 친정 집안의 초혼이 있는 날입니다. 장손의 결혼식이 아니라서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초혼이니만큼 전에 없던 집안의 경사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이 축복 속에 탄생하는 날입니다. 어제는 양가 집안이 함께한 자리에서 폐백식이 있었습니다. ‘폐백’하면 빼놓을 수 없는 절값을 챙겨 들고 자리에 앉아 예비 신랑 신부의 절을 받았습니다. ‘더도 말고 딸 아들 둘만 낳고 잘 살아라!’ 하면서 대추랑 밤을 던져 주었지요. 언제 이렇게 컸을까요. 아니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흐른 걸까요. 이 자리에 앉아 예전에 들었던 덕담을 내가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지요. 시골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다음 날 일찍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오니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저녁도 거르고 여행사에서 예약해준 공항 근처에 있는 여관에서 첫날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집안 어르신들께 큰절을 올리고 받아온 절값을 세느라 후들거리던 다리는 뒷전이었지요. 절값에 얹어온 마음들이 넉넉해서 행복했지요.  

 

좋은 일로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엄마 칠순에 모이고 20년만인가 봅니다. 그 사이 유명을 달리한 사람도 있고 새로운 가족도 생겼습니다. 이민자들의 삶이란 다들 그렇지요. 일부는 이곳에 또 일부는 한국에. 늘 조금은 허전한 채 살아가지요. 아버지 함자를 놓고 엄마가 가끔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일만이 자식들 아니라 할까 봐 일만 하느라 고생이 많구나!” 그런 사람들이 오늘은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한껏 멋을 부린 모습으로 하나둘 모여듭니다. 봄 소풍이라도 나온 듯 들떠 있습니다. 네 살짜리 조카 손녀는 자기가 나비인 줄도 모르고 나비를 따라다니느라 나풀거립니다.

 

아름드리 고목이 군데군데 서 있고 다람쥐들이 가끔 멈춰 서서 인사를 합니다. 머리 높이의 철조망 너머에는 서너 마리의 낙타가 연신 우물거리고 식장으로 향하는 길 양옆에는 작은 안개꽃 부케가 길을 안내합니다. 적당하게 자란 애기사과 나무에도 덩달아 꽃들이 소란스레 잔치를 벌였습니다. 함께 있어도 서로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작은 얼굴 가득 웃음을 키우는 꽃들. 와인 바랠 위에 장식한 수수해서 예쁜 꽃. 커다란 정자나무 아래 자연과 어우러져 소박하게 꾸며진 야외 식장은 바람과 더불어 구름 하객까지 모시기에 제격이었습니다. 적당하게 불어주는 봄바람에 맞춰 울리는 웨딩 마치. 바람 따라 흔들리는 그늘에 앉아 파란 하늘에 하얀 꼬리표를 길게 남기고 가는 비행기를 올려다보다가 이것저것 보태지 않아 순결하기까지 한 식순을 넘기며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살면 되는 거라고요. 나만의 빛깔로 궤적을 남기면 되는 일이라고요. 큰 것들만 바라보는 세상에서 작은 꽃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붉어지는 애기사과 꽃처럼 시큼 달콤한 작은 열매들을 맺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박해서 오히려 아름다운 그런 세상에서 주연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결혼은 철없을 때 하는 거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을 했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스물여섯 살에 큰오빠가 골라주는 웨딩드레스를 입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발이 필요한 큰오빠 대신 막내 오빠가 하겠다는데도 부득부득 절뚝거리며 내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갔지요. 그래서일까요. 결혼 생활이 절뚝거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기야 차를 운전하는 데도 얼마간의 교육과 면허증이 반드시 필요한데 하물며 가장 중요한 가정을 이루는 일에 면허증은커녕 교육도 없으니 당연한 일인 거지요. 증표도 없이 사랑한다는 확신만 믿고, 사람 됨됨이 하나만 보고 부모형제 친지들의 축복과 응원만으로 출발하니 말입니다.

 

유난스럽게 개구쟁이였던 녀석, 둘째 오빠의 장남이 제일 먼저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예쁜 신부를 맞아 사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행복해합니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것을 놓고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오지요. 그때마다 넘치는 결정으로 버거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출발하는 오늘처럼 수수하고 자연스러우면 좋겠습니다. 주어진 삶에 그저 얽매이기보다는 얽매임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색과 결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으면서도 불신의 씨앗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많은 세상입니다. I see you! 평생 둘이 마주 보며 눈빛만 보아도 느낄 수 있는 사람들과 마음껏 정을 나누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소소한 일상이 곧 행복이란 걸 알아가길 소망해 봅니다.

 

 

 

서로에게 기대어 더 붉어지는 하루가 있다

 

말은 하얀 마음일 때 물들기 시작하고

눈빛은 서로의 동공에 터를 잡아야 익어간다

 

함께 있어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커지는 웃음

 

햇볕에 그은 웃음만이

작은 그늘을 녹이고

둥글게 자란다

 

꽃이 꽃을 버릴 때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

 

앞마당에

소란스레 잔치를 벌인 꽃들

향긋한 속살 펄럭이며

작은 어깨 들썩이며

잇몸 환하게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다

 

김미희, (애기사과 꽃)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