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생각할 수 있는 가을, 사랑할 수 있는 가을, 기도할 수 있는 가을 그리고 눈물 흘릴 수 있는 가을을 너무도 아쉽게 보내고 있는 나를 위해서라도 너의 가을은 아름답길 바란다…로 시작하는 편지가 가을밤을 뒤척이게 합니다.  


“사랑하는 미희야!,“보고 싶은 미희에게” 혹은 “미희 보렴”으로 시작하는 백여 통의 편지들을 꺼내 놓고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읽습니다. 이제는 흐릿해진 기억들, 30여 년 된 고운 얼굴들이 말을 걸어옵니다. 정성스레 개봉된 항공 봉투에는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모나미 볼펜으로 또박또박 눌러 쓴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아픈 청춘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워서 행복해서 사랑해서 고독해서 아픈 영혼들이 청춘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잊고 지나간 세월이 폭우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흠뻑 젖고 말았습니다. 삼십 년 달라스 땡 볕에 잘 말려놓은 가슴이 출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둑이 무너져 지독하게 외롭다고, 무섭도록 그립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길들을 떠올렸습니다. 함께 걸으며 그 길 위에 남기고 온 그림자를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절절한 마음을 보니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들이 그리워 잡히는 대로 편지를 읽으며 하나씩 이름을 불러봅니다.

 
 스무 살 청춘에 덕수궁에 다녀와 봄소식을 전해주는 정희, 세월을 느끼고 인생을 느꼈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어려서 엄마를 여의어서인지 정이 많아 유독 눈물도 많았던 정희가 스무 번째 내 생일을 챙기고 있습니다. 일찍 철이 들어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던 과외 선생님과 결혼식 날짜를 잡아 놓고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다며 아쉬워하는 인묘. 갈색으로 선팅한 넓은 창가에 앉아 “그립다”며 우리가 함께했던 마지막 가을밤을 기억하라고, 새벽 기차 소리가 유난히 요란했던 그 자취방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던 인묘가 첫 아이를 출산하러 병원에 들어갔다고 알려왔습니다. 친구를 쏙 빼닮았을 그 아기가 잘 자라서 이제는 그때의 우리보다 어른이 되어 있겠지요.  
 “도깨비 같은 벗 보아라. 예고도 없이 미국 땅에 가 있으면 날더러 어찌 행동하라는 게야.”라고 뒷북을 치며 호통치는 효기가 있었지요. 키가 작아 1번을 고수했지만, 주근깨 가득한 얼굴은 우등생의 표상처럼 단아하기까지 했었지요.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상사의 신년사를 들으며 편지를 쓴답니다. 서설을 맞으며 출발 신호에 응한 우리의 신년이 열두 해 후 미련 없이 서설의 역할을 다 했노라고 끄덕이며 마무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나의 높은 옥타브로 외쳐 달라고 청합니다. 
 멋진 내 친구 선희는 목마와 숙녀를 사랑했지요.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을 따라 흐르던 우리들의 사랑 얘기를 좋아했지요. 내가 떠나오던 날 국내선에서 나를 찾아 헤매다 놓쳐버리고는 빈 하늘만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노라 던 선희, 그의 첫사랑이 끝남을 알려온 서신도 있었지요. 금의환향하는 날은 남편까지 만들어 꼭 대동하고 마중하리란 약속과 아픈 첫사랑을 고백하리라 다짐을 받았건만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소식이지요. 
곁에 없는 내가 꼭 필요한 이유에 대해 논술한 여덟 장의 장서는 아직도 상자 속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는데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할 줄도 모르는 페이스북도 뒤져보고 한국 갈 때마다 연락되는 친구들 통해 알아 보아도 꼭꼭 숨어 찾을 길이 없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첫 마음이어서 일 겁니다. 진실하고 순수했기 때문일 겁니다. 첫 마음이었기에 간절함으로 머물러 있는 거겠지요. 만나지 않는 한 삼십 년이 지난 것처럼 또 다른 삼십 년이 지나도 똑같은 그 시절 그 모습으로 머물게 되겠지요. 어쩌면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행복이 머물다 간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지요.  


그러니 만날 수 없어도 그리워할 수밖에요. 
더이상 다가가지도 않았으니 멀어지지도 않은 거라 생각하며 위로해볼 밖에요. 
그리움은 내 업보인걸요. 
하지만 그리운 것이 그리운 사람이 많다는 것은 행복한 순간이 많았다는 증거겠지요. 그런 생각하며 또 행복해지는 순간입니다.  


 여름을 삼킨 빨간 노을은 서녘 하늘에 닻을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와 쓰다만 삶의 이음새에 탄식처럼 눕는 해거름, 저녁연기 산허리에 나직이 깔린 장군산의 가을날 오후를 떠올려 봅니다. 세월은 양 떼를 우리로 들게 하는 석양처럼 조용히 다가와 사람을 늙게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아름다운 영혼이기를 한탄한다면, 생명의 땅에 가을이 올 때까지 시들지 않는 청춘의 꽃을 간직해야 하겠지요.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미라보 다리’중에서)
 

 

 

오래된 편지 상자를 연다

 

애써 외면해도
그럴수록 기억되는 아픔
모나미 볼펜자국에 눌린 채
코스모스 늘어선 길섶을 설레 보지만
오래된 종이 냄새로
그렇게 다시
상자 속에 들어앉는다

 

가을을 앓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들키지 않은 마음 하나

 

-김미희, (가을편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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