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촛불은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비도 내리지 않는 밤에 갑자기 정전입니다. 자정을 지나고 한 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께라고, 갑자기 캄캄해졌습니다. 단 한 번의 깜박임도 그 어떤 사전 징후도 없었습니다. 눈을 깜박여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시겠지 하고 앉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요. 하지만 조금 지나니 빛이 있었습니다. 뒷문을 통해 희미한 달빛도 들어오고 사물들의 모습이 하나둘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애꿎은 전화기만 켰다 껐다 하다가 눌러앉아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별빛도 없습니다. 어느새 달라스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밤공기가 제법 싸늘합니다. 훅훅 퍼부어대던 열기를 몰아내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뒷마당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차들은 불을 켜고 여전히 어디론가 달려갑니다. 뒤뜰 건너 사거리 신호등도 정전이 되었는지 달리던 차들도 하나씩 속도를 줄이고 섰다가 갑니다. 잠시 멈추어 양옆을 살피겠지요. 호흡을 고르고 다시 속도를 올려 일상의 틀 속으로 사라집니다. 뒷마당 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 불 꺼진 집을 바라봅니다. 불빛 한 점 새어 나오지 않는 집은 낯섭니다. 등 돌리고 가버린 매정한 사람 같습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마음 같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이 생각나 촛불을 켜 들고 책장 앞을 서성입니다. 책 제목이며 작가, 주인공 이름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매일 똑같은 시간에 정전이 되는 집안에서 벌어지는 단 며칠 간의 이야기였지요. 젊은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 어느날 정전을 알리는 노트 한 장이 날라 옵니다. 언제부턴가 한 집안에서 각자의 삶을 살던 부부는 정전의 시간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을 하게 됩니다. 환하다고 생각했던 각자의 방에서 나와 정전 속으로 들어간 그들은 매일 저녁 서로에게 말못 할 비밀 한가지씩 털어놓기로 합니다. 서로의 비밀을 통해 눈물을 흘리고 사랑의 아픔도 알게 됩니다. 결혼 전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저녁을 먹은 식당에 다시 돌아가 팁을 계산해 주고 왔다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어리둥절합니다. 이유인즉슨 저녁 먹는 내내 이 여자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들떠서 팁 주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남편의 고백에 그들은 오랜만에 뜨거운 밤을 보냅니다. 그 대목에서 정전의 밤이 끝났어야 했는데, 하루가 더 이어지면서 해피엔딩이 아닌 각자의 인생을 간다는 아쉬움 때문에 아마 내 기억에 남아있나 봅니다. 아팠지만 슬펐지만 사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정전되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히려 환한 마음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마음의 숲에서 펴낸 김수현 작가의 팡팡 터지는 그림에세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냉담한 현실에서 어른살이를 위한 to do list. 갱년기였나 봅니다. 별일 아닌 것에 아프고 이래저래 서운한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올해는 유난하게 앞이 캄캄했던 날이 많았습니다. 마음의 불이 꺼져 막막했던 날. 마음속 정전이었습니다. 플래시처럼 건전지 빵빵하게 충전된 채로 항시 대기하던 엄마마저 가시고 나니 마음속 비상 촛불 하나 찾지 못해 암울하게 지냈던 적이 있었지요. 쓸쓸해서 눈물이 나고 그러다가 화가 나서 또 울었습니다. 바깥출입은 커녕 겨우겨우 일만 하며 보낸 날이 많았지요. 몸에 켜졌던 환한 불이 일시에 꺼졌지요. 그야말로 정전이었습니다.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까웠는지 갑자기 친구가 밥 먹자고 불러서 나갔더니 충전하라며 내민 것이 이 책이었습니다. “내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을 것” 첫 페이지부터 입꼬리 올라가게 하면서 긴장하게 했지요. 

 

마음의 비상 촛불까지 두 개 세 개 밝혀 놓고 책을 다시 들춰보며 “인생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 다짐합니다. 결국에 비상 촛불은 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 누가 켜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켜야 된다는 것이지요. 내 마음은 나의 방이지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니 불을 끄고 켜는 것도 나의 일이지요. 어차피 인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끙끙거리지 말고 마음 졸이지 말고 이해받으려 애쓰지 말며 주눅 들 만큼 겸손하지 말자고 위로해 봅니다.

11월에는 아주 조금 근사해진 나를 만나면 좋겠습니다. 표정에 마음에 생각에 기분에 쓴 가면을 벗어던지는 것부터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도 쉽게 계절이 가고
생각은 가면을 벗네

눈 감지 말고
허리를 세워 떼를 쓰면
바람도 멈춰 서는지
물어보고 싶네
 
너무 멀어 아팠던 나와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한통속이 되어
나는 내가 되고
너를 그냥 너로 볼 수 있다면 좋겠네
 
환했던 골목이
수화(繡畫)처럼 저물고 있는 이쯤에서
묵은 목단(牧丹)이 아직은 환한 그 양단이불에
눕고 싶네

김미희, (11월에는)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