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1482) 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서 프로요 신부는 인쇄본의 발명을 시작이 아니라 끝이라고 보았다. 그는 한 손에 책을 들고 노트르담 성당 첨탑을 멀리서 바라보며 “아 슬프도다! 이 책이 저 건물을 파괴 할 것 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단순히 인쇄와 읽고 쓰는 능력이, 중세 지식의 저장소인 교회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은 그것의 표현 양식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종국에는 삶의 방식을 예측불허하게 변모 시킬 것이란 경고가 들어있다. 빅토르 위고의 예언대로 우리는 후기 인쇄시대에 살고 있다. 당시만 해도 기계화된 인쇄기를 이용해 신문, 잡지, 그리고 소설 같은 것들을 대량 출판 하는 일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일반대중에게 지적 르네상스의 시작, 인문학의 문을 활짝 열어 준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워드 프로세싱, 데이터 베이스, 이메일 , 월드 와이드 웹, 컴퓨터 그래픽 같은 인쇄 커뮤니케이션을 생각하면, 종이책을 만드는 인쇄기는 한낮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인다. 지금은 1인 1컴퓨터 시대로 거의 모든 개인이 글을 쓰고 인쇄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수많은 정보의 홍수로 지적 평준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 이젠 암기를 잘해야 우등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양질의 컨텐츠를 선별하는  안목이 있느냐가 관건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지적능력의 깊이나 다양함이 초기 인쇄 시대 사람들의 그 것보다 더 나은지는 알 수가 없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선 때 아닌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교육방송에서 각계의 명사들을 초빙해서<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철학 문학 역사를 중심으로 강의를 했다. 각계의 명사들은 반 세기만에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사회가 그간 소홀히 한 인문학정신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양극화를 비롯한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지니고 했다고 분석했다. 대학마다 졸업해서 취직도 안 되는 철학과나 역사학과 등을 폐지하고 돈이 되는 학과만을 신설하는 풍토가 퍼진지 꽤 되었다. 4년 내내 공부한 학생들이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같은 나라로 알고 국경일이 무슨 날인지도 잘 모른다고 한다. 자식이 보험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그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아내에게 카톡으로 보내거나, 어금니 아빠 사건처럼 자신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딸 친구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죽이는 끔찍한 사회가 된 것이다. 물론 미국이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할 것 이다’ 란 명언이 절로 생각 날 만큼 총기 좋아하는 미국사회는 무차별 총격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이런 문제가 인문학 강의 몇 번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한 인간의 가치관은 어느날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아기부터 부모나 사회로부터 받아온 교육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유아기 아이들을 두고 한 실험에서 인간이 최초로 나 아닌 타자를 이해하는 시기는 다섯 살 부터라고 한다. 이 시기가 되면 아이는 세계의 중심을 자아에서 벗어나 타자를 인식 하기 시작한다. 이 타자를 인식 한다는 것 이야 말로 인문학의 시작 이다. 그런데 이제 선진국이라면 맞벌이가 필수가 된 시대에 부모와 눈 맞추고 자라는 아이들은 드물다. 게다가 빈곤층으로 갈수록 방치되는 경우가 많아 인간은 어린시절부터 타자와 살아가는 법 보다 소외와 고독을 먼저 경험 하게 된다. 세상은 점점 살기 더 편해 졌지만, 정신적인 공허감은 그 어느 시대 보다 위험한 수준인 것이다.

요즘 즐겨 보는 티브이 프로그램 중 ‘알쓸 신잡( 알아두면 쓸모없는 신기한 잡학사전) 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작가 유시민을 비롯한 각 분야 패널 네 명이 출연해서 함께 여행을 다니며, 그 여행지에 대해 답사를 하고 함께 식사를 하며 토론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여늬 프로그램과 다른 것이 여행지 답사도 각자의 취향대로 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전공을 활용하여 여행지를 새롭게 보는 시각을 만든다. 

 

남자 넷이 이야기 하는데 이야기의 끝이 없다. 종교, 정치 철학, 건축, 문학, 과학을 넘나들며 한 토픽을 두고 다양하고 재미있는 해석이 끊임없이 나온다. 보통의 중년남자들은 서로 안지 얼마 안 되는 경우, 통성명 하고 공통 관심사 한 두 가지 얘기 하고 나면 서로 할 말이 없다는데, 이들의 수다는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처럼 계속 이어진다. 난 그 프로를 보며 그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애 유성룡의 안동 병산서원 하나를 가지고도 남한산성 까지 연결시키며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니 말이다.

지난 토요일 뉴코 강당에서는 달라스 최초로 ‘인문학 강의’가 열렸다. 주제는 ‘나와 너가 아닌 더불어 살기’ 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당은 꽉 차지 않았다. 그럼에도 강의를 주도하신 윤석산 시인께서는 시작이 반이라고, 마른 땅에 겨자 씨 하나 심어놓고 가신 것인지도 모른다. 바쁜 이민 사회에 인문학적 성찰이란 화두를 남겨두고 가셨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돈만 아는 천민자본주의로 부터 벗어나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너와 나는 다른 편이 아니라 같은 편, 같은 동포, 같은 인류로 더불어 살며 동행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 하는 일이다. 인간을 존중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좁혀 좀 더 인간답게 살아 갈수 있는 인문학적 사고가 꼭 필요한 이 시대에, 시의적절한 강의를 마련해 주신 한인회에 감사드리며, 이런 기회가 자주 오기를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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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자
시인 /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