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 칼럼 ] 시공(時空)속의 닮은 꼴, 그 전설을 읽다

 

 

제17화 한니발 알프스를 넘고, 고선지 천산산맥을 넘다

 

전략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BC 247-183) 는 고대 카르타고의 군인이며 정치가였다. 카르타고는 지금의 아프리카 북단에 있는 튜니스에 해당된다. 로마가 아직 소국으로 있을 때 카르타고는 지중해 일대의 강국이었다.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사령관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니발의‘로마 정복’은 아버지에 이은 대명제요 숙제였다.포에니 전쟁은 BC 264년에서 146년 사이에 카르타고와 로마가 벌인 전쟁을 말한다. 포에니(Poeni)는 라틴어 페니쿠스(Poenicus)에서 왔는데,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부친 이름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 불릴만큼 한니발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로마 정복 전쟁이었다. BC 218년 한니발은 숙적 로마를 공격한다. 한니발은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30여 마리 코끼리를 앞세워 대 군사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 갈리아 남부를 돌아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었다. 그것도 한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했지만 북 로마 침공에 성공하였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카르타고의 동정만 살피고 있다가 한니발의 알프스 전략에 허를 찔린 것이다.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을 때 행군에 방해되는 바위를 산성인 식초를 부어 깨드려가며 길을 내고 행군을 했다. 그는 전술에 능할 뿐아니라 과학 지식도 상당했다고한다. 군인들에게 갈증과 피로를 해소 시키기위해 식초를 지니라 했고 여인들은 자진해서 머리칼을 잘라 활 줄을 만들어 전쟁 도구로 썼다고 한다. 한니발은 아군과 적군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살피면서 로마 주변 도시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고,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한니발의 군대가 겨울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은 사건에 대해 플루다크는 <플루다크 영웅전>에서 ‘한니발은 눈병을 치료하지 못해 한쪽 눈을 잃었음에도 작전에 몰두하였으며 원주민 포로들 중 용맹한 전사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는 등 관용을 베푸는 지도력을 발휘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한니발이 스페인, 시실리아, 그리스등지에서 격돌하는 동안 로마 군은 지연술로 전열을 가다듬는다. BC 202 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처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여 전쟁이 끝났다. 겨우 31세에 불과한 로마의 젊은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어느새 한니발의 전략을 습득하고 한니발을 친 것이다. 결국 한니발은 적에게 자신의 전략을 물려주고 패하게 되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을 마시고 자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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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바르카 (Hannibal Barca, BC 247-183) 

 

군사사학자 시어도어 에이랄트 닷지(Theodore Ayrault Dodge <Hannibal 1995>)는 로마가 한니발을 무찌르기 위해 한니발의 전술과 전략을 활용했다며 한니발을 ‘전략의 아버지(father of strategy)’라고 했다. 한니발을 알렉산더나 나폴레옹과 같은 전략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은 예는 한니발 이후 그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과 나폴레옹이었다. 이들의 알프스 행군이 여름에 시행된 것에 비해 한니발은 겨울에 넘었다. 또한 이들에겐 한니발이라는 선례가 있었으나 한니발에게는 선례가 전무하여 모험의 정도에서 한니발이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 ‘전략의 아버지’란 명성은 결코 헛되이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파밀고원을 넘은 고선지 장군


영국의 동양학자 아우렐 스타인(Sir Marc Aurel Stein, 1862-1943)은 ‘고선지 장군이야말로 일찌기 유럽이 낳은 어느 유능한 사령관보다도 탁월한 전략과 통솔력의 소유자였다’고 격찬했다. 무엇보다도 스타인은 8세기의 고구려계 당나라 명장 고선지의 업적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었다. 프랑스 동양학자 에두아르 샤반느(Chavanne 1865-1918년) 역시 1907년에 나온 논문<한국의 고대 왕국 고구려에 관한 보고서>에서 고선지의 활동을 밝혀놓았다.
고선지는 고구려인 고사계의 아들이었다. 고사계는 고구려 멸망 후 당으로 강제 이송된 유민의 한사람으로 장군의 지위에 있었다. 부친을 따라 서역에서 성장한 고선지는 20 세에 벌써 안서도호부의 장군이 되어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고 이어 안서도호부 부사령군에 올랐다. 고선지는 ‘아름다운 용모에 말타기와 활을 잘 쏘는 호남이었다’고 <구당서 고선지 편>에 적고있다. 용맹스런 군벌들이 들끓고있던 이 서역에서 고선지가 뛰어났던 것은 어릴 때부터 이곳 지리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전투는 대개 1 차 747년 파미르 지방 원정, 2 차 750 년 타시켄트, 우트베크 지방 원정, 3 차 751년 탈라스(러시아 카자프 남단 가까움), 4 차 755 년 안록산의 난 때 동관(장안 동쪽 전투) 원정을 든다.
1차는 747년. 고선지는 보병과 기마병 1만을 거느리고 파미르 원정에 올랐다. 일찌기 스타인이 ‘나포레옹의 알프스 돌파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고 격찬한 바 있는 대산악 작전이었다. 고선지의 당군은 행군 40일만에 파미르 고원을 넘고 60여일에 대설령 힌두크시(히말라야) 산맥에 이르렀다. <신당서>에 ‘이 때 보병도 모두 말을 가지고 따랐다’고 했는데 이유는 사막지대와 고산지대 등 불모의 땅에서 식량 보급을 스스로하기 위함이었다. 티베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이 험란한 통로를 택한것은 고선지의 전략이었다.
2차는 750년. 1차 원정 3년 후 고선지는 지금의 키르기스 지역으로 향하여 2차 원정에 오른다. 칙명을 받은 고선지는 재차 파미르를 넘어 사라센을 분쇄하고 멀리 타시켄트까지 북상하여 정복한 뒤 그 왕을 사로잡아 장안까지 호송하였다. 그러나 당 조정은 타시켄트 왕을 참살한다. 이것이 후일 고선지의 3차원정의 근원이 되고, 고선지를 불리한 입장에 몰리게 된다.
 

3차는 751. 탈라스 원정은 제 2 차 원정때의 전후 처리가 잘못되어 일어난 것이다. 포로로 삼아 당제에 바친 타시켄트왕을 참살했으니 이 일은 곧바로 중앙아시아 각국의 격분을 샀다. 호시탐탐 동방 진출을 노리고있던 사라센 제국은 당제국에 반기를 들도록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충동하여 연합군을 만들어 고선지와 결전을 하게 되었다. 고선지는 탈라스 평원에서 벌어진 5일간의 전투에서 사라센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고선지로서는 패전이었지만 이 탈라스 전투는 세계문명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때 포로가된 당인들에 의하여 제지술, 화약, 나침판이 중동과 유럽으로 전파 된것이다. 탈라스 전투에서 사라센군에게 잡힌 포로 한사람이 탈출하여 당에 되돌아와 <경행기>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서 제지술 전파의 사실이 밝혀져 있다.
 
755년 안녹산이 낙양을 점령하고 난을 일으켰을 때 고선지가 출동한다. 그러나 곧 자신의 옛 부하였던 감군 변영성의 모함을 받고 참수 당한다. 고선지는 죽기 전에 “내가 후퇴한 것은 죄이니 죽음도 감히 마다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를 도적으로 몰아 재물을 차지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라고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밝힌다. 고선지가 죽음을 앞에 두고 장병들을 돌아보며 “나에게 죄가 있거든 그대들은 ‘죄’가 있다고 말하라. 그렇지 않다면 ‘면죄’라고 말하라”하니 군중이 모두 ‘면죄’라고 외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케하였다고 <신당서>는 기록하고있다. 일대의 호걸은 이렇게 갔다. 그의 나이 겨우 40을 전후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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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재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