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동음이어(同音異語) 

 

영재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금서는 누군가와 전화 통화중이었다.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였기 때문에 긴 생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영재는 잠시 머뭇거리다 창가에 놓여 있는 소파로 가 앉았다. 잠시 금서를 바라 본 영재는 금서가 훌쩍거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응, 알았어. 엄마” / “그렇게 할께”/ “응,응, 있다 봐”.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통화를 하던 금서는 전화를 끊고 의자에서 일어나 아무 일도 아니란 표정으로 영재에게 다가왔다. 
“오빠 왔어? 우리 오목 두자” 금서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바둑판을 앞쪽으로 끌어당기며 영재 옆으로 바짝 다가 와 앉았다. 둘이는 자연스럽게 몸 좌,우 면이 붙었는데 영재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태연한 척 했지만 실은 금서의 풋풋한 머릿결 냄새로 혼절할 지경이었다. 영재는 긴장을 풀기 위해 금서에게 말을 걸었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까 보니 우는 것 같던데.” / “아니, 별 일 아냐.’ / “오빠, 우리 오목이나 두자.” 금서는 바짝 영재 몸 쪽으로 다가앉으며 팔을 뻗어 바둑알을 놓았다. 

 

영재의 이마에는 일 수없는 땀방울이 맺혔고 숨쉬기가 곤란해 졌다. 그 때 마침 책상 뒤편 진열장에 놓여 있던 라디오에서 외국 여가수가 애절하게 부르는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목을 두던 금서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영재에게 물었다.
“오빠,새디스트(saddest)가 뭐야?”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영재는 순간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새디스트(sadist)?”라고 반문했다. “응, 새디스트(saddest).” / “아! 새디스트(sadist).” 그건 가학성애자를 말하는 거야. 자신이나 타인을 학대하며 쾌락을 느끼는 일종의 정신병이지.” 영재는 정답을 맞힌 학생처럼 금서를 쳐다보았다. 
“----” 말없이 영재를 바라 본 금서는 영재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무렵 영재는 원하지 않은 전공을 택하게 된 것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전공과는 무관한 분야의 독서에 심취해 있었다. 영재가 금서의 돌발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던 배경도 그러한 영향이 컸다. 특히 영재는 심리학에 열중하고 있었다. 금서의 시큰둥한 반응에 영재는 내가 잘못 말했나 싶었지만 틀릴 까닭이 없었다. 
역시 젊음은 좋았다. 그런 사소한 문제에 시간을 낭비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이내 둘이는 기분이 밝아져 두던 오목의 재미에 빠져 들어 갔다. 오목을 두는 중간중간 자석의 음극과 양극이 끌리듯 두 사람의 옆 부분이 밀착되면서 영재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영재는 마른 침을 조심스레 삼켰다. 이를 눈치라도 챈 것일까. 금서는 두던 오목을 멈추며 물었다.

 

“오빠, 우리 밥 먹으러 갈까?” / “ 으응, 그러지 뭐” 
속마음은 그녀랑 오목을 더 두고 싶었으나 음흉한 속을 들킨 것 같아 못내 동의를 하고야 말았다. 딴은 저녁시간 때가 되기도 했다. 퇴근 준비를 하면서 금서는 동갑내기 사촌 동생인 은서에게 전화를 했다. 셋이서 찾아 간 봉천동시장 순대 식당 골목은 많은 청춘들로 북적거렸다. 그 중 한 식당에 자리 잡은 영재 일행은 순대볶음과 소주를 시켰다. 
금서를 통하여 얘기는 들었으나 그 날 처음 본 은서는 육감적인 외모의 성숙한 숙녀였다. 섹시한 매력이 있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이국적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나이를 뛰어 넘는 그녀의 거침없는 입담이었다. 술잔이 한 순배를 돌자 그녀가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아찌, 아찌는 왜 금서를 만나?” / “...........?” / “아찌. 금서랑 한번 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은서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은 금서의 은밀한 곳을 가르키고 있었다. 
엥, 이게 뭔 소리. 영재는 귀를 의심했고 혼란스러워졌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숙녀 입에서 거리낌 없이 나올 말은 아닌 거였다. 머쓱하게 테이블 너머로 본 금서는 사촌동생의 그런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영재는 한마디 대꾸라도 해야 할 것 같았으나 뭐라고 해야 할지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영재는 말을 맺지 못하고 어색함을 털어 내고자 술잔을 거푸 들이켰다. 
사람의 감정은 참 알 수 없었다. 그 날 홍역을 치른 이후로 영재와 금서는 ‘참새와 허수아비’가 되었다. 금서는 가을 들판을 지키는 외로운 허수아비였고 영재는 그런 금서를 예고도 없이 찾아 와 그늘에서 먹이를 쪼며 놀다가 푸득 날갯짓하며 날아가 버리는 한 마리 참새였다. 그렇게 이 년여 세월이 흘러갔다. 영재는 그동안 준비해온 고시에 연속으로 실패하자 더는 미룰 수 없어 입대를 하였다. 금서하고는 장래를 생각하는 그런 연인관계가 아니었기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았다.
영재가 금서를 다시 깊게 생각해본 계기는 영재가 훈련 도중 당한 불의의 사고로 무릎을 크게 다쳐 군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군 생활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의병제대를 하게 된 때였다. 입대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동안 잊고 지냈던 금서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녀와의 앞날을 그려 보았다. 집으로 귀가 후 바로 금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금서는 그 자리에 있었고 영재를 반겨 주었다. 

 

다음날 사무실로 금서를 만나러 간 영재는 금서의 제의로 은서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은서는 자리를 잡고 앉 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아찌, 무슨 이유로 유부녀를 만나러 오셨어요?” 
순간 강한 충격을 머리에 받은 듯 영재는 “예?”하고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잠시 후 제 정신이 동아 온 영재는 금서를 바라보았으나 금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이 없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은서를 먼저 보낸 둘이는 근처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아니, 어떻게 그리 결혼을 빨리 할 수가 있어?” 

 

영재는 바보같이 이미 남의 여자가 되어 버린 금서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때까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던 금서도 지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오빠가 기다려 달라는 말이라도 했어요?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사람을 난들 어떡해요.”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영재와 금서는 ‘참새와 허수아비”였다. 금서는 노래 <참새와 허수아비>를 좋아 했다. 영재는 그런 금서를 위해 노래를 배웠고 불러 주기를 좋아했다. ‘나는 나는 외로운 지푸라기 허수아비, 너는 너는 슬픔도 모르는 작은 참새...’그렇게 젊은 날의 한 페이지가 넘어 갔다.

어느 날, 한국에 있는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생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오빠,금서가 죽었대.” / “뭐라고?” 영재는 긴장으로 순간 목소리가 높아 졌다. “금서가 죽었대” 동생은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아니. 왜 금서가 죽어” / “ 유방암인데, 급성이었대” 여동생은 금서와 고교 단짝 친구였다. 전화를 끊고 난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날 밤, 금서는 꿈속에서 영재를 찾아 왔다. 슬픈 듯 옅은 미소를 띠며 영재에게 물었다. 
“오빠, 새디스트(saddest)가 뭐야?” 영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금서를 꼭 안아 주며 속삭였다. “그래, 금서야 지금 나는 새디스트(sadist)가 되어 내 자신을 가장 아프게 때려 주고 싶어. 그리고 미안해, 너를 지켜 주지 못해서...”
머리맡 어디에선가 멜라니사프카(melanie safka)의 새디스트 씽(the saddest thing)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김 희  중
오클라호마 거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