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꽁트 볼리비아 김

2018.02.09 11:58

KTN_WEB 조회 수:140

  [꽁트릴레이 ] 한인 작가 꽁트 릴레이  9  

 

볼리비아 김 

 

박스를 패킹할 때는 언 동태처럼 풀어져 있던 볼리비아 김의 눈알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 생기를 발하며 뒤룩거렸다. 이제부터 당신이 모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놓겠다, 그런 눈이었다. 공연히 팔뚝을 쓸어 올리며 무슨 비밀이라도 알려줄 듯이 이마가 닿도록 상체를 숙여왔다.
-정말 쭉쭉 빵빵한 백마가 쌔고 넘쳤어, 진짜 그림처럼 예쁘다구, 저기, 저 달력에 있는 모델같이 미끈한 백마가 쫘~악 깔렸다니까!
이슬을 한 병이나 들이부은 볼리비아 김은 벌건 얼굴로 식당 벽에 붙은 달력을 손가락질하더니, 그 손바닥으로 테이블 왼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끝까지 ‘쫘~악 깔렸다니까!’에 맞춰 길게 비행을 했다. 정식은 속으로 에이, 뻥치시네, 하면서도 그가 가리키는 달력속의 미녀들을 건성 돌아보았다. 비키니를 잎은 세 명의 백인모델들이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서핑보드를 들고 백사장을 걸어가는 그림이었다. 
-아니, 볼리비아에 무슨 백마가 있나요? 고작 작달막한 히스페닠 아가씨들이나 있겠지요. 
어깃장 놓는 정식의 반론에 볼리비아 김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쳇, 하며 눈을 흘겼다.
-이 사람아, 모르면 국으로 가만히 듣기나 해. 내가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겠어? 내 얘기는 현지인들 가는 싸구려술집이 아니라, 외국인들 상대로 하는 고급클럽을 말하는 거야. 거긴 별천지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원정 온 쭉쭉, 빵빵, 흑마 백마들을 얼마든지 입맛대로 데리고 놀 수 있다니까. 비싸지도 않아, 하루저녁에 이십 달러야. 단돈 이십 불!
-팁을 이십 달러라는 말이에요?
-팁? 하, 이 사람 답답하기는, 거긴 팁 없어, 이십 불은 뭐냐 하면 바로 원나잇스텐 비용이야, 백마를 하룻밤 산다 이 말이야, 운 노체 아모~르! 
정식이 매니저로 있는 K홈쇼핑 물류창고에는 볼리비아 김까지 합쳐서 총 5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노랭이 사장이 어찌나 알뜰하게 사람을 부려먹는지 화장실에 갈 시간도 아껴야할 판이다. 그런데 가끔 볼리비아 김이 무단결석을 한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그런 날은 그의 몫까지 감당하느라 나머지 직원들의 발바닥에서 불이난다. 퇴근시간쯤 되면 어김없이 볼리비아 김의 전화가 걸려온다.
-매니저님, 나 뜨끈한 순대 국 한 그릇 사주슈.
정식은 한결같은 그의 행태가 미워서 대답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하지만 다운타운의 회사를 빠져나와 10W프리웨이에 오르면 한인 타운을 지나치지 못하고 결국 버몬트 에비뉴에서 내리게 된다. 아바이 순대국집 입구 대기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볼리비아 김은 정식의 차가 파킹랏으로 들러서면 그제야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런 날이면 지난 밤 무슨 짓을 했는지, 술을 얼마나 마셔댔는지 안색이 초췌하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몇 번 물어봤지만 그는 언제나 얼버무리기만 할뿐 행적을 시원하게 밝히지 않는다. 소귀신처럼 말없이 뜨거운 국만 후룩후룩 마시고 연거푸 소주잔을 털어 넣을 뿐이다. 그러면 머잖아 몸이 풀리고, 마른 얼굴에 화색이 돌고, 드디어 입이 열린다. 
-에이...아무래도 이놈의 미국생활 때려치우고 내려가야 할까봐, 있어봐야 사람만 망가지고 뭐 되는 게 있어야지... 늘 하던 소리다. 떠나왔던 볼리비아로 돌아가겠다는 말이다. 정식은 이번에야 말로 그의 타령에 장단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 사정이 어떤지 모르지만 내려가셔서 하실만한 일이 있다면 그래보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요? 청년시절부터 이십 년 넘게 사셨으니 친구나 지인들도 많으셔서 도움도 받으실 수 있잖겠어요? 형제분도 있다고 들었는데...
정식은 너무 나갔나싶어 그쯤에서 말끝을 흐렸다. 
-그럼, 많지. 형제들 도움까지도 필요 없어. 사업하는 후배들도 많으니까 가서 말만하면 얼마든지 도와주지 어제도 후배 한 녀석과 통화했는데 다 때려치우고 얼른 내려 오라더라고.
-어유, 그렇다면 뭐가 걱정이세요, 나 같으면 당장 내려가겠네. 정식의 적극적인 반응에 그의 큰 눈이 또 뒤룩거리기 시작했다. 상체를 바짝 움츠리며 이마를 숙여왔다. 
-매니저님, 우리 같이 갈래? 
생각지도 않은 그의 제안에 정식은 화들짝 놀랐다. 얼른 이마를 떼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며 눈만 끔벅거렸다.
-오호, 놀랄 만도 하지. 너무 급작스러운 제안이니 왜 안 그렇겠어. 자, 그러면 기왕 이렇게 된 것 내가 솔직히 말하지.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말이야. 볼리비아 김은 자기도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며 정말 진실을 말할 때 짓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난 지금 돈이 한 푼도 없어. 아무리 지인들이 도와준다고 하지만 그건 사업에 관한 것이지 주거와 식생활비까지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두꺼비도 낯짝이 있지. 내게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남아있다구. 그것만 해결되면 다른 일은 걱정할 게 없어. 자, 내가 매니저님 이해를 돕기 위해 그곳에서의 사업을 간단하게 설명하지. 바로 날라리를 만들어 파는 일이야, 사업이고 뭐고 없어, 아주 간단해.
-날라리요? 그게 뭐예요?
-어, 그 왜 여자들 여름에 입는 블라우스 있지, 소매 없이 어깨끈으로 걸치는 여름 옷 있잖아, 기장은 짧게 배꼽까지 내려오는 그걸 날라리라고 해. 볼리비아에서 의류 사업하는 한국 사람들 끼리 지어 부르는 이름이야. 미싱 서너 대 놓고 현지 기술자들 시키면 하루에 수 백 장씩 쏟아져 나와, 그걸 시장에 내다 팔기만 하면 되는 거야. 만들기만 하면 판로는 얼마든지 있어. 없어서 못 팔아, 땅 집고 헤엄치기라니까.
-주거와 생활비가 제법 많이 들겠지요? 정식은 무엇에 홀린 듯 그렇게 물었다. 
-에이, 물가 싼 남미에서 생활비가 들면 얼마나 들겠어. 다만 하우스는 좀 큰 걸로 얻어야 공장으로도 쓰고 살림도 하고 그러지. 이것저것 해서 우선 한 이 만 달러 정도만 가지고 내려가면 그런대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자, 사업얘기는 천천히 하고 우선 한 잔 들자고.
소주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권하는 볼리비아 김의 제안에 따라 건배를 하며 정식은 세이빙어카운트에 들어 있는 3만 달러를 떠올렸다. 마흔이 넘도록 혼자 살며 근근덕신 모아둔 돈이었다. 혹 좋은 인연이 생기면 결혼자금으로 쓰던지, 아니면 독립할 기회가 왔을 때 요긴하게 사용하려고 꿍쳐둔 돈이었다. 그런데 지금 볼리비아 김의 사업계획을 듣고 보니 드디어 자신이 기다리던 기회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생겼다. 돈을 빌려달라지 않고 함께 가자고 하는 볼리비아 김의 제안도 한 가닥 의심마저 버리게 하는 믿음으로 작용했다. 빈속에 털어 넣은 소주가 긍정의 마그마에 불울 붙였던지 정식의 사고는 통제할 수 없는 낙관론으로 치달았고, 결국은 쭉쭉 빵빵 백마와 사랑에 빠지는 환상까지 떠올랐다.
그러다 정식은 고개를 들었다. 볼리비아 김의 큰 눈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런데 눈이 뒤룩거리지 않았다. 뒤룩거림을 멈추고 정지한 큰 눈알이 다른 사람 같았다. 정식은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쿵, 울렸다. 눈앞으로 삼만 불이 새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가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생각이 확 바뀌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 돈... 없어요, 정말이에요, 한 푼도 없다고요!  * 

 

이용우
소설가. LA거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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