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제20화. 남원 만인의총(南原 萬人義塚)과 교토의 귀무덤 이총(耳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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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한국 방문 중에 전라도 남원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친구들이 “남원으로 놀러 가자”는 말에 남원이 춘향의 고향이라는 것만 떠 올리며 길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일 만 사람이 죽어 묻힌, 일만 인의 한이 서린, 일만 사람들의 무덤 ‘만인의총(南原 萬人義塚)’을 만나게 될줄이야....사적 272호로 지정되어있는 남원 만인의총은 전라북도 남원시 행교동에 있다. 이곳은 일본의 조선 2차 침입인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무력으로 죽어 간 남원의 관군민간 일만 여명의 합동무덤이다.
 정유재란 (丁酉再亂)은 1597년 8월 일본이 조선 정벌 야욕을 접지 못하고 조선에 재침공하여 1598년 연말까지 지속된 전쟁을 말한다. 당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제압하였고, 일본 육군은 보급로를 마련하려고 전라도를 점령한 후 한양 공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남원은 호남 곡창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고 전략의 요충지였다. 선조 30년 8월, 1만6천 일본군이 일시에 남원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을 때, 남원 사람들은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이 때 관군 4천과 남원 사람들 1만 명이 죽었다. 넓은 들이 피로 물들고 남은 것이라고는 겨우 부서지다만 민가 17가구였다. 들판에 버려지다시피 한 시신들은 ‘코’나 ‘귀’가 잘려나간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일본군들은 자신들의 전공을 위해 시신들의 코나 귀를 베어갔으니 남원 일만 의총에 묻힌 사람들은 코나 귀가 잘려나간 채 묻혀있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짓이었다. 그는 공이 많은 군인들에게 포상을 주는 심사 규정으로 신체의 일부인 코나 귀를 베어 오도록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쟁에서 군인들이 서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민간인을 죽여 그 신체의 일부를 베어다가 수를 세어 전공으로 삼은 예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잔혹 행위였다. 남원 뿐 아니라 일본군이 지나간 조선의 땅에는 황폐와 통곡이 있을 뿐이었다. 임진왜란의 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한 조선 측 사망자는 십팔만여 명에서 1백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땅의 경작지 66%가 파괴되었다. 이는 한국인의 삶이 몇 세기를 거치며 피폐해진 원인이 되었다. 문화재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을 위시한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었다. 이외에도 민가, 포도청, 서원 등이 파괴되어 1950년의 한국전쟁과 비견될 정도로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고 전한다.

 일본 교토에 있는 코 무덤(귀무덤)
 도대체 그 많은 조선인의 코나 귀를 베어다가 어찌 했단 말인가. 요즈음 한국인들의 일본 나들이는 이웃집 방문하는 정도로 쉬운데, 교토에 있는 귀무덤(코무덤)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고 한다. 여행사 안내원들이 여행자들의 기분을 살피느라 안내하지 않는다는 게 비밀 아닌 비밀로 되어있으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교토에는 명물은 많다. 금각사, 은각사, 기요미즈테라, 황궁, 산쥬산겐도 등등등...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꼭 한번 가봐야 할 곳이 바로 미미즈까(귀무덤, 이총)라고 불리우는 봉분이 아닐까한다. 여행 중이나마 선조들의 구원(仇怨)을 위로하는 방편으로 말이다. 지난 날 일본 여행에서 스쳐갔던 이 무덤이 생각난 것은 얼마 전 남원에서 만난 ‘남원 만인의총’을 방문하고서다. 일만 사람들의 코나 귀가 베어져 일본 교토에 따로 묻혀있으니 ‘몸 따로, 귀 따로’ 무덤에 서린 한(恨)이 수백 년이다. 현재 귀 무덤은 일본 교토 시 히가시야마 구에 있다. 교토시가 세운 ‘귀무덤 (耳塚 미미즈카, 코무덤) 설명 팻말에 적힌 내용이다. ㅡ이 무덤은 16세기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 바 한국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1592-1598년)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에 조선 군민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공품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되어 공양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그 수량을 적은 확인서까지 배부했으니 휘하 장수들은 서로 혈안이 되어 조선인을 학살했다. 베어진 코와 귀는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보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귀무덤(코무덤)의 유래이다. 
 ‘귀무덤’이라 쓰고 괄호 안에 ‘코무덤’을 덧붙여 놓았다. 그리고 안내서에는 이 코무덤에는 조선인 12만6000명분의 코가 묻혀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너무도 당당하고 뻔뻔스런 설명이다.
 지금도 교토의 천수각에는 1597년 10월1일 히데요시가 발행한 특이한 영수증이 소장돼 있다. 영수증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지역에 출정한 나베시마 가츠시게 군대가 전라도 금구 김제 지방에서 절취한 조선인의 코 3369개를 바치고 받은 수취장이다. 전장에서 히데요시의 측근이 코를 받았음을 증명하는 영수증을 써주고, 코는 술통에 넣어 일본으로 보내 히데요시가 실제 검사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또 일본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인의 귀와 코를 1300개나 잘랐다고 기록에 남기고 있다. 히데요시는 코나 귀 하나 하나를 세어서 셈을 하고 
감사장을 써 주거나 그에 맞는 상을 내렸다. 
 
 오사카 항에 도착한 귀와 코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교토로 가져가 매장했다. 이것이 오늘날 귀무덤이라 불리는 이총(耳塚 )이다. 왜 이총인가? 코나 귀를 베어다가 무덤을 만들었으면 비이총(鼻耳塚)이라해야 옳지 않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악하여 사람을 죽이고 ‘코’를 베어오라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귀보다는 코를 자르는게 셈하기에 편리 했을테니까. 여러모로 보아 코 무덤이라는 게 맞을텐데 귀 무덤이라 칭하게 된 이유가 가증스럽다. 원래 “코무덤이었지만 그것이 너무 야만스럽다”며 에도시대의 어느 유학자가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한데서 코 무덤이 귀 무덤으로 왜곡 되었던 것이다. 
 왜곡은 일본인의 전매특허가 아니겠는가. 코무덤은 야만스럽고 귀무덤은 야만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같은 일본인 어느 교수는 “현재 사람들이 “귀무덤”이라고 알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따지면 귀무덤이 아니고 코무덤이다. 히데요시의 명령은 코를 베라는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고 주장하나, 이 말은 오히려 히데요시의 힘을 과장하고 있는 듯하여 언짢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총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파견 되었을 때 통신사 일행이 이총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무덤 전체를 천막으로 가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총은 1898년 메이지시대에 들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재 단장되었는데 이유는 일본의 군국적인 힘을 자국민에게 선전하려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 이총이 있는 그림엽서까지 발행하였다. 아직도 일본인에게 이총은 학살과 약탈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나 부끄러움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은근히 과시하는 상징물인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귀무덤(코무덤)에 대한 논문과 책이 다수 발간되고 있는데 한국의 연구는 미비하다고 한다. 교토 귀 무덤에 묻힌 조선인 원혼을 달래는 길은 귀무덤인지, 코무덤인지, 귀코무덤인지의 ‘사실’을 밝히고 억울한 혼을 위로하는 길 뿐이리라.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이총문제 등등... 일본, 정말 싫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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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재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