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숲은 품어도 넘치지 않는다

 

 새소리가 부릅니다. 지난주에 잠깐 들었던 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가 기억 속의 소리까지 다 불러모아 나를 부릅니다. 내 정서의 밑바닥에 앙금처럼 가라앉았던 소리가 일제히 기상을 한 모양입니다. 잠이 부족해서인지 세수를 했어도 눈곱이 낀 것처럼 눈이 성가시지만 발길은 벌써 공원을 향하고 있습니다. 30일이 지나도록 안 쓰던 근육은 재활이 필요하다며 잡아끄는 남편을 따라간 건 지난 주말이었습니다. 얼마 있으면 떠나야 할 백두산 여행길에서 짐짝이 되기 싫으면 걷는 연습이라도 하라는 훈계와 반협박 때문이었지요. ‘짐짝’이란 말에 겁이 덜컥 났습니다. 운동이 필요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게으름이 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방전 직전까지 몸을 혹사하고 겨우 몇 시간 자는 거로 충전을 해왔으니 발달한 근육이라고는 일할 때 필요한 것뿐. 그것도 이젠 기름칠이 되지 않아 삐끄덕 거립니다. 한 뼘 언덕에도 숨이 차 헉헉거리는 자신이 어이가 없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숲의 향연饗宴에 마음은 들떴습니다. 

 

 도시 한복판에 있는 요람에 왔습니다. ‘Arbor Hills Nature Preserve’ 지척에 놓고도 이런 공원이 있는 것도 몰랐습니다. 아니, 30년 가까이 플래노에 살면서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못 했던 일입니다. 차를 몰고 5분만 나오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품을 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일요일 아침 일찍인데도 공원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꽉 찼습니다. 간편한 차림으로 나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충전하러 온 사람들. 하지만 모두 한가지 생각으로 나왔겠지요. 지친 삶을 재활하기 위해 꾸밈없는 자연으로 돌아왔겠지요. 모르는 사람들과의 아침 인사는 상쾌합니다. 땀이 흐르는 발개진 얼굴은 누가 봐도 누구라도 예쁩니다. 먹고사는 일에 지친 심신을 어디에서 어떻게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 나만 모르고 살았나 봅니다. 이제 세상 빛을 본 지 겨우 열흘 되었다는 갓난아이부터 거동조차 힘든 할머니까지. 뛰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사람. 강아지한테 끌려가는 사람. 음악에 맞춰 흥얼거리는 사람. 혼자 온 사람부터 3대의 가족행렬도 있습니다. 

 

 주차장과 연결된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중심으로 걷다 보면 갈래갈래 숲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있습니다. 돌부리 나무뿌리 울퉁불퉁한 자연 그대로인 샛길은 앞서간 사람들의 흔적들이 길을 인도합니다. 어느 샛길에 들더라도 한 곳으로 연결된 것은 꼭 우리의 삶과 닮았습니다. 태어났으니 어떻게든 살다 가야 하는 인생 같지요. 반듯하든 구부러져 있든 모든 길은 풍경과 소리를 거느리고 있지요. 그 길 위에는 알게 모르게 함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속을 훤하게 내보이는 시냇물도 있고 바람 소리도 있습니다. 누구든 어떤 것이든 다 받아주는 숲. 품어도 품어도 넘치지 않는 품. 일상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천천히 걷든 빨리 달리든 앉아서 쉬든 눈치를 볼 일이 없는 것이 자연의 품이지요. 

 

 매미소리, 새소리, 시냇물소리. 내 몸이 어느새 유년 시절에 들었던 소리를 기억해 내고 있습니다. 그때 그 소리가 아직 있었습니다. 이곳에도 있었습니다. 아니, 내가 귀를 닫고 살았던 게 분명합니다. 잠자리, 나비들이 앞서 날아가고 산 비둘기 한 마리가 뒤를 따르며 목청을 높입니다. 나뭇가지의 율동에 맞춰 스텝을 밟는 새의 흥겨운 발가락이 있습니다. 덩달아 기다란 다리를 접었다 폈다 흐르는 시냇물을 점벙거리는 소금쟁이. 길섶에 작은 풀꽃들은 사람들의 발걸음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을 흔들어 인사를 합니다. 구름 의자에 앉은 태양이 참 맑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높아 보입니다. 아령을 들고 뛰듯 걷는 아저씨를 세 번째 만났을 때야 그분의 연세가 70은 족히 넘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으로 하여금 저분이 아령을 들고 달리게 했을까요. 주차장 옆 공원 벤치에 자리 잡은 젊은 부부는 꼬마 아이 둘을 데리고 소풍 나온 모양입니다. 도시락을 펴느라 분주합니다. 새 소리, 바람 소리를 쌈 싸서 먹는 도시락은 어떤 맛일까요      

 

 5층쯤 되는 정자에 올라왔습니다. 숨을 고르며 내려다본 동네는 조용합니다. 그런 마을의 풍경이 낯설어 꼭 먼 곳에 와 있는 기분입니다. 내가 사는 곳을 가늠해보며 어제 이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쳇바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웅크렸던 뼈마디 여기저기서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립니다. 구겨져 주름투성이인 마음도 뒤틀렸던 마음도 스트레칭을 하나 봅니다. 돌무더기 내 안창 어딘가에도 속이 훤하게 보이는 시냇물이 흐르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좁쌀만 한 내 품도 조금은 넉넉해지지 않을까요. 

 숲, 숲, 숲! 옹알이를 합니다. 벌써 내 마음속에 작은 숲이 들어앉았나 봅니다.

 

너를 보내고 산에 오른다

기어 다니다

걸음마를 시작하던 숲에 들기 위해

산을 오른다

 

닫혔다 열렸다

있다가 없다가 하는 너를 향한 새 한 마리

발톱을 세워

가지의 흔들림을 움켜쥔다 해서

마음은 마음대로 몸은 몸대로

거품만 무성히 흔들리던 날들의 맘속 눈금을

잴 수 없었다

 

흔들리는 건 네가 아닌 나였으니

 

뿌리째 뽑혀나간 내 속 깊은 생채기에

잔뿌리 하나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봄비 내릴 것이라는 기대 없앨 수 없어

차라리 너와 함께 했던 길을 벗어나

그늘이 둥근 깊은 숲

모태에 들기 위해 산을 오른다

 

수풀이 우거져 앞이 보이지 않아도

속이 훤한 개울물 여전히 흐르고

풀꽃들 저마다 몸을 흔들며

내 첫 걸음걸이 소리를 기억해 주는

숲에 들기 위해 산을 오른다

 

 - 김미희, (산을 오른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