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소설]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인연의 두께만큼 외로움도 짙다
 
 숨 쉴 틈 없던 하루가 마무리되어갑니다. 아침부터 온종일 발만 동동거리다 만 것 같습니다. 허기진 저녁나절은 더 쓸쓸합니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소나기가 내린 줄도 몰랐습니다. 정말 힘든 하루였습니다. 25년 동안 휴가를 앞둔 날은 늘 이런 풍경이었습니다. 휴가를 간다는 생각으로 들떴던 마음은 떠나기 며칠 전에 지치고 맙니다. 떠나는 며칠을 위해 떠나기 전 며칠간은 곱절로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점심도 거른 터라 에너지가 방전되어 머리가 터질 듯 아파도 약을 찾아 먹을 시간도 없습니다. 이런 질긴 일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휴가라는 짧은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나의 멍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최악의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Janet씨가 왔기 때문입니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주문으로 자가 최면을 걸며 머릿속에 입력을 시도하지만, 마음은 벌써 빨간불을 깜박입니다. 막 달리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상황이 도래한 것이지요. 아직 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녀는 “늘보”처럼 여유 작작 입니다. 나의 불편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워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그녀가 오늘은 그저 원망스럽습니다.   그녀는 20년 된 단골손님으로 올해 여든 살이 되었지요. 수수한 옷차림이 말해주듯 단정하고 편안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겸손해지곤 한답니다. 작년에 50년을 함께한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지요. 남편은 암을 발견한 지 채 일 년도 넘기지 못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한동안은 두문불출하셔서 뵐 수가 없었지요. 그분이 오시거나 전화가 걸려오면 마음을 느긋하게 먹어야 하는데 오늘 같은 날은 정말 난감합니다.
 원래도 말이 많았는데 남편을 보내고 난 후부터 말이 더 많아졌습니다. 똑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처음에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습니다. 그분이 문을 밀고 들어오면 짜증이 올라올 때도 잦았습니다. 어느 한 가지도 대충 넘어가는 것이 없었지요. 똑같은 옷이 열 벌이라면 그 열 벌을 모두 입어 봐야 했으니까요. 까탈스러운 성격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에누리 없는 성격대로 모든 일에 경우가 바르고 깔끔합니다. 그런 사람이 언제부턴가 불뚝불뚝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걱정이 됩니다. 그녀가 챙겨주는 길고 긴 안부가 그립기도 하지요.
 엄마를 보내고 나니 혼자되신 어른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화를 걸어 겨우 “밥은 먹었어?” 가 전부였습니다. 어제 한 말을 또 하는 엄마에게 “엄마 그 얘기 한 번만 더하면 백번이야.” 하면서 통박으로 입을 막곤 했지요. 할 말은 없지만, 말이 고프고, 손길이, 눈길이 그리웠던 것이었지요. 외로우셨던 거지요.
 
 아무리 빡빡한 삶이라도 리듬은 있습니다. 평생 잊히지 않을 숨 막히는 어떤 슬픔도 내일은 더 아플지라도 오늘은 왠지 견딜 만할 정도의 평화를 허락하기도 합니다. 기쁨도 스쳐서 옵니다. 불현듯 옵니다. 미리 알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듯 마음도 억지로 움직일 수 없지요. 이리저리 떠돌다가 어디에 가서 둥지를 틀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한동안 잊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는지 전화를 걸어 안부를 챙깁니다. 영원히 머무를 것 같다가도 돌아보면 어느새 저만치 멀리 가 있습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는데 부메랑 되어 눈앞에 있습니다.
 여행 잘 다녀오라고 일부러 들려 예쁜 카드에 용돈까지 챙겨주시는 Janet씨를 보며 인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나의 무엇이 그녀에게 가 닿았을까요. 어쩌다 한 번씩 보는 그저 한 동네 살면서 손님으로 아는 사이일 뿐인데 말입니다. 얼마나 외로우면 나한테까지 마음이 쓰일까요.
 좋은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은 더 외롭습니다. 짐을 꾸립니다.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될는지, 그 인연이 어떤 외로움으로 나를 찾아올지 설렙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불시에 들이닥치는 외로움은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보내도 보내도 가지 않고 떠난다 떠난다 하고도 떠나지 않는 외로움은 삶의 은유입니다.
 


보내도 보내도 가지 않고
떠난다 떠난다 하고도 떠나지 않는 게 있다
 
세상의 틈새를 죄다 훑느라 쳐져버린 눈매
텅 빈 버스 손잡이처럼 혼자서 흔들거렸을 몸으로
눈길이 그립고 발길이 그리워 허기진 저녁나절
인연의 두께를 더할수록 외로움도 짙어지더라며
차곡차곡 개켜 담았을 오래된 말들을 부려놓는다
 
모든 나이를 지나 이제는 저물 일밖에 없다는 그녀는
그래도 괜찮다고, 아직은 밤이 아니지 않아 라며
풀어놓는, 짧거나 길거나 한 문장들을 자꾸
시간의 발뒤꿈치에 엉겨붙인다
 
아무에게도 가 닿지 않는 미완의 문장들도
오래 묵으면 대륙과 섬 모두 담아내듯
한곳에 오래 머문 것들은 뿌리를 깊이 내리나보다
 
그녀의 존재는 이렇게 늘
감사하다, 고맙다며 몇 마디를 덤으로 뚝 떼어주며
저물녘을 밟아 일어서는
소금기 가득한 하루의 붉어짐이다

 


-김미희, (저녁나절)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