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 1802-1885)는 1832년 6월에 발생한 파리혁명을 배경으로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1862>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19세기 초, 프랑스는 정치적 격동기를 겪고 있었고 이로 인해 도탄에 빠진 서민들의 삶은 비참하다는 말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위고는 책의 서문에서 “가난으로 인한 남자들의 타락, 배고픔으 인한 여자들의 파멸, 육체와 정신적 암흑으로 인한 어린아이들의 발육부진은 시대가 풀지 못한 세가지 문제들이었다”고 기록하여 당시의 프랑스 서민들의 처절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1 각각의 인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에 입각하여 입체적이고도 개성있는 캐릭터를 창조함으써, 당시 시대상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통찰력을 예리하게 반영했다.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용서 (forgiveness)’이다. 19세기 초, 프랑스는 공화제을 지지하는 공화파와 왕정을 지지하는 왕당파로 갈라져 혁명과 왕정복고가 반복되는 격동의 시기였다.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자기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당파적으로 분열되어 서로를 반목하며 극심한 대립을 반복했다. 지도자의 정치적 과욕으로 말미암아 서민들의 삶이 도탄에 빠진 모습을 목격한 그는–비록 그는 공화파에 속해 있었지만–정파에 관계없이 동족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를 드러내 보였다. 위고는 이 소설을 통하여, 정파간에 극한 대립, 사람간의 증오와 반목, 계층간의 불신 등 이 모든 사회적 문제와 혼란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양한 용서의 개념
용서의 사전적 의미는 “가해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멈추는 것” (to cease to feel resentment against an offender)이다.2 일반적 용법에 있어는 용서란 상대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하는데 촛점이 있다. 법률적인 용례에서는 빚, 부채, 채무 등을 변제 혹은 포기하는 행위로서 ‘용서’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때 사용되는 ‘용서’란 개념은 재판관이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거나 명령하지 않는 자비적 선언이다.
철학적, 종교적 관점에서 용서는 ‘상대를 나와 같이 대우하라’라는 말로 통일 된다. 우선 불교에서의 용서는 “일체중생의 불성은 모두 같다 (一切衆生 皆有佛性)”라는 ‘평등심 (平等心)에서 찾는다. 때문에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경스러운 행위이다. 모든 중생은 부처가 가진 본성과 동일한 성품을 가지고 있기에, 상대가 죄인일지라도, 오히려 그를 존경해야 해야한다는 논리이다. 이는 그리스어 철학에서 용서의 의미로 사용하던 ‘에이도스, aidôs’ (=respect for others, 다른 사람을 존경하다))와 같은 맥락이다. 불교는 인간중심의 철학이기에, 용서의 관점도 다분히 인간의 의지가 개입됨을 알 수 있다. 용서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를 위해서, 조계종의 종정이었던 성철스님은 ‘용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부처나 죄많은 중생들은 그 자성(自性)이 동일하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람할지라도, 그를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더 나아가서 용서한다는 말은 할수 없다. 3
게다가, 내게 잘못한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대단한 인격모욕이라고까지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심중에는, 자신은 잘했고 상대는 잘못했다는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불교가 말하는 용서는 신(神)의 이름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행적 의지에 기반한 실천덕목일 것이다. 용서의 성립은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잘못을 인정하는 양심적인 중생들 상호간의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쌍방 존경과 인정에 그 바탕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의 용서 개념에는 용서를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간과되어 있다. 즉, 변하지 쉬운 인간의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조건 없이 용서하도록 가능하게하는 ‘초월적 사랑’의 결여이다.
유가사상에서도 ‘용서’는 ‘타인을 나와 같이 대우하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공자의 이상적 도덕인 인(仁)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인 <논어>에는 ‘용서’에 대한 귀한 대화록이 다음과 같이 담겨있다.
자공이 물어 말하기를 “한 마디의 말로써 평생토록 지켜 행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공자 말씀하길
“그것은 서(恕)일 것이다. 자가가 하고자 아니한 바를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4
여기서 서(恕)는 ‘남을 용서한다’는 뜻이다. 서(恕)는 여(如=같다)와 심(心=마음)으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내 마음과 같이 남의 마음을 생각해 주는 것’ 이다. 즉 다른 사람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인(仁)이다. 용서는 인(仁)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도 소위 ‘황금율 (Golden Rule)’–“무엇이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그렇게 남을 대접하라” (마태 7:12)–이라 불리우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다. 이는 예수님이 주신 두번째 대계명인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 또 다른 표현이다. 황금율은 모든 종파를 월하여 온 인류가 가슴에 담아야 할 보편적 가치이나, 기독교가 타종교및 철학과 구별되는 점은 ‘용서’에 대한 해석적 관점이다. 기독교는 용서를 단지 타인을 내몸과 같이 대하는 차원을 넘어 생명과 관련짓고 있다. 즉, 용서를 죄(罪, sin)와 그에 대한 ‘사면’ 또는 ‘구원’과 결부시켜 설명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용서’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아피에미(ἀφίημι)’ 의 문자적 의미는 ‘떠나가게 하다 (=to let go)’ 와 ‘빛을 청산하다’ (to settle one’s debts)이라는 중복적 뜻을 담고 있다.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빚을 청산하다’라는 두번째의 뜻이 보다 접근성이 있다 (누가 7:41~42). 켄터베리의 주교였던 앤섬 (Anselm of Canterbury, 1033/1034 ~ 1109)은 그의 저서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 Cur Deus Homo>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공경의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빚을 갚은자는 무죄하며, 갚지 못한자는 죄인이라고 하였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하나님은 또한 공평하고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는 반드시 처벌하셔야 했다. 하나님은 큰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의 죄값을 누군가 대신 치르게 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죽음으로써 우리의 무한한 죄의 빚을 지불하심으로써 우리는 용서를 받게되었다.
이렇듯, 기독교에서의 용서의 방법과 수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의 이론은 후대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존 칼빈의 속죄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계속)

 

1. Victor Hugo, Les Miserables (London, Penguin Books Ltd., 1982), 7-8.

2. Merriam Webster, forgiveness, [on-line]; accessed 17 Jan. 1019; available from https://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forgive; Internet.

3. 성철스님, “하안거(夏安居) 반결제법어” (1982. 6. 20), 월간해인, (2012).

4. 공자, 논어, in 사서오경 (四書五經), 유정기 편역 (서울, 동서출판사, 1985),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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