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傾聽)은 없고 ‘딴청’만 난무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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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는 남의 말에 귀 기울이려는 미덕(?)이 없어진 것 같다. 언론 보도를 보거나 가끔 개인적으로 사람을 만나 세상 얘기를 하다 보면 왠지 ‘대화’가 없다. 상대방의 말에 대해 전혀 들어보려는 생각도 없이 논리도 안 맞는 자기주장(主張)만 앞세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완전히 딴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아 황당해지기도 한다. 특히 이 정부의 집권층들이 그 전형이다.

이 나라 제1야당 대표가 목숨을 담보하고 영하의 날씨 속에서 일주일째 노숙 단식을 하고 있다. 국가 현안(懸案)에 대한 성실한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마이동풍, 강 너머 불구경이고 심지어 비아냥도 심하다. 굶어서 얼어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태도다. 정부 여당이든 청와대든 우리 75년 헌정사 중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많은 사람들이 징그럽게 싫어하던 전두환 시절에도 이러지는 않았다.

경청한다는 것은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이다. 자기 주장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것도 건성건성 듣는 게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듣는 것이다. 한자 풀이로 ‘듣는다’는 의미의 청(聽)은 ‘왕의 귀(耳+王)로 듣고, 열 개의 눈(十+目)으로 보고, 하나의 마음(一+心)으로 대하고 듣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왕의 귀로 듣고, 열 개의 눈으로 보고, 하나의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경청(傾聽)에 대해서는 여러 말 들이 있다. 1단계 무시하기 / 2단계 – 듣는 척 하기 / 3단계 – 선택적 듣기 / 4단계 – 귀 기울여 듣기 / 5단계 – 자신을 중심에 두고 공감적 경청 등등…많은 단계가 있다고 한다. 동서양의 고전 설화라 할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나 ‘탈무드’ 또는 공맹(孔孟)의 어록에서도 ‘듣는 마음’을 곧 경청(傾聽)이라 했고, 그래서 경청(傾聽)이라 하면 다시 말해, ‘귀를 기울여 남의 얘기를 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듣는다는 것은 상대의 호감을 얻을 수 있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사람 됨 됨을 상대에게 보이고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의 반대 어휘로 ‘딴청’이라고 한다는데, 이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을 말한다. 나는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래서는 대화(對話)가 안 된다. 물론 소통(疏通)도 안 된다. 아니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안 된다. 의미공유(意味共有)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적인 ‘소리의 경청(傾聽)’보다는 우리 모두는 서로 간에 말하지 못하는 ‘침묵의 말’과 억눌러 놓았던 ‘내면의 소리’, 무심했던 이웃의 ‘신음소리’와 천리(天理)를 이르는 ‘하늘과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진실을 듣고자’ 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불통은 이미 소문이 나있다. 주변과는 물론 국민과의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여당과는 물론이고 집권층 내부와도.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대화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화하지 않으니 소통이 안 되는 것이고 정부 각 부처간의 정보공유도 안 되는 것이다. ‘어전회의’에서 대통령의 생각이 곧 ‘법’이니 아랫사람이 감히 거기다 토를 달 엄두가 안 날 것이다. 그래서는 각료나 참모들이 죄 지당대신(至當大臣)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체이탈(遺體離脫) 어법(語法)이 횡행하고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난무(亂舞)하며 온 나라가 우왕좌왕하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은 혹 ‘내가 짐(朕)’이라는 권위의식을 가진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면 턱도 없는 착각이다. 권위(權威)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지만, 이는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 최소한 현안을 올바르게 분석하여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대통령의 권위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좌파정권은 과거의 것을 가지고 지금을 재단(裁斷)하고 재량(裁量)하려 한다. 그래서 뒷북을 친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변해 가는데 이를 따라잡지 못하니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공직(公職)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지 말아야 한다. 사명감을 지녀야 한다. 먼저 국익(國益)과 공익(公益)을 생각해야 하며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앞세우고 ‘나’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다. 정권이 바뀐 이후, 소위 보수든 진보든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과, 정권에 발맞추는 명색의 언론들이 일제히 ‘국민의 소리 듣기’ 경청(傾聽)를 거부(?)하고 있다. 그냥 패거리 문화를 형성하여 모처럼 담론(談論)의 장(章)이 펼쳐지더라도 그저 현학(玄學)적인 아리송한 표현들로 말장난 같은 ‘딴청’들만 한다. 아무리 말로 ‘펭끼’ 칠을 해도 ‘사실’이 ‘거짓’으로 덮어질 수 없음을 본인들도 잘 알면서 마치 ‘아무나 말 잔치’를 벌이는 모양새라 참 딱해 보일 때가 너무 많다.

정말 경청(傾聽)이 잘 이뤄지면 어려운 일에 고민하거나 수고하지 않고 쉽게 공동의 답으로 풀 수 있는데….왜 그것이 어려울까 안타깝다. 주변의 간언을 잘 들을 줄 알고, 누가 어떠한 비난을 해 와도, 그것이 옳은 말이고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경청(傾聽)의 자세다. 상대가 언짢고 귀 따가운 얘기를 할라치면 그냥 귀를 막는 사회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연습하자. 옛말에 ‘죽을 때 철이 난다’고 말했듯이 모두가 누구나 열심히 ‘듣는 연습’을 하자. 그래서 죽기 전에 철이 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

손용상 논설위원

본 사설의 논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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