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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인 홍영순 씨도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처럼 고생을 고생이라 생각하지 못한 세월을 겪었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고 힘들었던 때라 고생이 뭔지 몰랐다.
그러나 엄마의 몫까지 떠안은 삶은 동화 속 주인공은 될 수 없었다.
엄마의 부재 속에 아버지마저 해외 근로자로 가족을 떠나 ‘괌’에 계셨고, 동생들을 다독이기에는 큰누이, 큰언니 그리고 엄마 몫까지 챙기는 것이 너무 버거워 울기도 숱하게 울었다.

 

1980년 2월 13일 만삭의 몸을 한복으로 감추고 김포공항을 박차고 나오며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
괌에 도착 13일 만에 딸을 낳아 진짜 엄마가 되지만, 동생들을 챙기는 몫을 놓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 몫을 늘어만 같다. 그러나 희망이 보이기 때문에 감내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시간이 지날수록 밝게 변했다. 아직도 음지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양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년 후 남편이 오고 가족은 Wichita Falls에서 Irving로 옮기며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숱한 사람을 만나며 자신이 짊어졌던 짐이 남들보다 무겁거나 버거웠던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다.
그때가 흔히 초기 달라스 한인 이민사를 장식하는 ‘남청여봉’의 시대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고 정 없는 사람 없던 1990대 초의 풍경이 그랬다.

 

그리워 찾아온 이들의 사연과 푸념을 들어주던 그녀가 심부름 중에 길을 잃으며 들어선 세계가 우체국이다. 그곳에서 27년을 일했다.
1800개의 거리 이름을 외우며 시작한 일이 벌써 퇴직을 앞두고 있다. 지나고 보니 한순간이지만 그곳에 쏟은 땀과 열정 그리고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숙명인지도 모른다. 홍영순 씨가 하는 일이 사연을 연결하는 일이다. 밤새워 사연을 연결한다. 그 중엔 “희로애락’으론 부족한 사연도 있다.

 

누군가의 죽음, 이혼, 파산 등 숱한 사연을 연결하며 자신에게 주어졌던 몫을 떠올린다. 큰딸로 태어나 엄마의 몫으로 그리고 엄마와 며느리로 아내와 병든 시어머니의 수족이 되었던 10년의 세월 속에서 그녀를 지켜준 것은 희망이었다. 꿈이 없었다면 그녀의 삶은 쉽게 무너져내릴 모래성이었을 것이 다.
그 꿈은 자신을 밟고 나선 형제들과 자녀의 성공이다.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사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태워 만든 빛이 그들의 길이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는 언제까지 함께할 수 없는 존재다.
엄마도 엄마의 삶이 있고 꿈이 있고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5남매를 두신 그녀의 어머니도 막내가 7살이던 해에 가족 곁을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아직 엄마의 보호가 필요한 5남매는 큰 누이이고 큰 언니인 그녀를 엄마라 생각했고, 그녀 역시 엄마의 몫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모든 역경을 탓하지는 않았다. 지나고 보니 숙명이었고 추억이었고 본보기였다. 누군가의 어머니였던 홍영순 씨는 아직도 5형제의 어머니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사진 글_ 김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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